최근의 이태리 영화의 성공은 절반은 여배우들의 힘이고 그들은 하룻밤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태리 영화가 성공한 이유의 다른 절반은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고 카메라(원문에는 ‘아메리’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카메라’의 잘못된 표기로 보임 ─ 편집자) 앞에서 그들의 동작을 하나하나씩 지도하고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서 다른 더 매력이 있는 여성의 목소리를 에프레코(후에 녹음한다는 뜻)하는 영화감독의 수완이다.
그러한 감독의 한 사람인 에마누엘 카스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아름다운 꽃이라면 보자마자 꺾어둡니다. 오피스에서도 상점에서도 공장에서도 농원으로부터라도 또는 길거리에서라도 꺾습니다.” 이러한 정도로 이태리 영화에서는 여배우가 소중하여 세계 영화 수출에 있어 영국, 불란서를 능가하고 아메리카의 다음가는 제2위에 약진했다. 숫자상으로 말하면 이태리에서는 1948년에는 극영화 54편을 만들었는데 1953년에는 극영화 145편, 기록영화 400편, 뉴스 영화 370편으로 약진하고, 1,700편 이상의 프린트를 85개국에 수출했는데 그중의 3분의 1은 색채 영화다.
숫자는 이 정도로 하고 이태리 영화를 성공시킨 일반의 이유, 즉 아름다운 여배우는 어떻게 탄생되는지를 살펴보자. 이태리는 미인 콘테스트의 나라이다. 젊은 여성의 대부분이 미스 이태리가 아니면 적어도 미스 로마가 되고 싶다고 꿈꾸고 있다. 미인 콘테스트라는 것은 세계 일반으로 특히 영화감독들에게 여성의 재색의 전부를 나타내는 찬스를 준다. 1946년의 미스 로마는 참으로 아름답고 신체가 튼튼하였다. 이것이 그 후 유명하게 된 실바나 망가노다.
그를 비롯해서 지나 롤로브리지다, 실바나 팜파니니, 소피아 로렌, 루시아 보제, 지안나 마리아 카날레, 홀뷔이나 프랑코 등도 미스 이태리가 아니면 미스 로마의 영관(榮冠)을 받은 후 스타로 된 사람들이다. 오늘의 이태리 여배우들 중에서 미인 콘테스트의 우승자가 아닌 사람은 겨우 에레노 라 로시 도라고, 로사나 포데스타, 레아 파도바니의 세 사람밖에 없다.
지금 참고 삼아 바스트, 웨스트, 히프 등으로써 이태리 여배우를 미로의 비너스와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단위 ─ 인치)
비너스 | 망가노 | 팜파니니 | |
바스트 | 37 | 36 | 37 |
웨스트 | 26 | 25 | 24 |
히프 | 38 | 35 | 36 |
신장(피트) | 5.4 | 5.6 | 5.8 |
미인 콘테스트는 별로 하더라도 이들 스타들은 어떻게 해서 최고의 지위를 얻게 되었을까.
실바나 망가노
25세, 자색 눈, 밤색 머리, 시칠리아의 철도 공안관을 아버지로 어머니는 영국인이다. 1946년 미스 로마의 영관을 획득한 후 영화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바이플 레이어(단역)을 하고 있다가 「쓰디쓴 쌀」에서 일약 스타로 되었다. 그의 특장은 곡선미, 그의 넘치는 것과 같은 육체감은 할리우드를 놀라게 했다. 그 후 「율리시즈」에 출연.
실바나 팜파니니
녹색의 눈, 검은 머리, 미인 콘테스트에서 우승하자마자 곧 영화계에 들어갔다. 그가 어떻게 영화계에서 성공했는지는 비너스와의 비교표를 보면 명확하다.
지나 롤로브리지다
구라파 제일의 미녀라고 하는 그는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감독의 눈에 발견되어 어떤 영화에 단역을 얻고 배우로서의 스타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오늘에 이른 것은 1947년 미스 로마가 된 이후의 일이다. 당년 27세 유고슬라비아인의 의사와 결혼하고 있다. 이태리 영화를 성공시킨 다른 절반의 이유, 훌륭한 감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 말기까지 소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큰 스튜디오는 파괴되어 있지 않으면 군에 등용되어 쓸 수 있는 영화시설은 시대에서 뒤떨어진 낡아빠진 것밖에 없었다. 세트를 만들려고 해도 손쉽게 돈이 없다. 그래서 감독들은 그들의 영화의 대부분을 야외에서 촬영하고 자연의 세트를 쓰고 통행인을 엑스트라로 했다.
이 때문에 제작비는 참으로 쌌고 또 그들은 거액의 샐러리를 요구하는 유명한 여배우를 쓰지 않고 무명의 아름다운 여성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연기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숙련한 감독의 훌륭한 수완과 훈련에 의해서 연기를 극복해 나갈 수가 있었다. 진실을 그리는 영화를 억압하고 있었던 파시스트의 검열에서 해방된 감독들은 사회의 부정과 이태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 역할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무방비 도시」, 「구두닦이」, 「자전거 도적」 같은 훌륭한 것이며, 그들의 작품은 신선하고 그 자연스러운 리얼리즘은 돈을 많이 들인 온실에서 자란 할리우드의 작품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아메리카에서는 간혹 작품의 내용보다도 그 작품을 만드는 데 얼마만 한 비용이 들었다는 것이 선전상에서는 중요시되고 있다.
오늘날 이태리 영화는 날로 약진하고 있다. 불과 10년 동안에 그들의 영화는 세계 제2위의 자리를 잡고 우리나라에서도 몇 사람의 이태리 영화감독과 망가노, 팜파니니,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중해에 임하고 남부에 자리 잡은 기후청명, 풍물가경인 이태리에는 많은 미인들이 속출되고 이들은 이태리 영화를 장식한다. 물론 작년의 눈[雪]이 금년의 눈으로 될 수는 없으나 각지에서의 미인 콘테스트가 계속되고 훌륭한 감독이 그 역량을 발휘하는 동안 이태리 영화는 약진할 것이다.
─ 『여원』(195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