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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문] 낭객의 신년 만필 - 신채호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수필)

by 시애틀 2020. 12. 20.

작품의 소개

 

이 작품은 중국에 머물며 독립 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작자가 국내 독자들을 위해 쓴 것이다. 이 글에는 국권상실의 시대에 우리 문예의 의식과 사명이 오로지 일제 강점기라는 현실 극복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여기에 제시된 부분은 문예 운동의 피해를 비판한 부분이다. 작자는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으므로 조선의 현실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근래 문예 운동이 성행하는 사실을 안다고 하며 그 문예 운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 비판을 위해 중국의 한 잡지에 실린 중국 문예 운동의 폐해에 대한 글을 인용하는데, 중국의 경우가 우리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것이 작자의 주장이다. 결국 문예 운동의 성행이 다른 사회 운동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 작자의 판단인 것이다.

 

낭객의 신년 만필 - 신채호

 

신년의 만필(漫筆)이 무엇이냐? 신년의 연하장을 올리려 하나 시각 대변(時刻大變)의 병자에게 만수무강의 축사를 드림과 같고, 신년의 감상담이나 쓰려 하나 운유(雲遊)의 낭객(浪客)이 너무 명사의 구문을 배움이 주제넘은지라, 신 것, 매운 것, 단 것, 쓴 것,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인 고로 〈신년의 만필〉이라 제(題)하노라.

 

1. 도덕과 주의의 표준


옛날(舊時[구시])의 도덕이나 금일의 주의(主義)란 것이 그 표준이 어디서 났느냐? 이해(利害)에서 났느냐? 시비에서 났느냐? 만일 시비의 표준에서 났다하면 《청구이담집(靑丘俚談集)》에 보인 것과 같이 나무의 그늘에서 삼하(三夏)의 더위를 피하고는 겨울에 그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인류며, 소를 부리어 농사를 짓고는 그 소를 잡아먹는 인류며, 박 연암(朴燕巖)의〈호질(虎叱)〉문에 말한 것같이 벌과 황충이의 양식을 빼앗는 인류니, 인류보다 더 죄악 많은 동물이 없은즉, 먼저 총으로 폭탄으로 대포로 세계를 습격하여 인류의 종자를 멸절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인류는 이해 문제 뿐이다. 

 

이해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廣狹)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본사(本師)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기의 이(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2. 이해와 권형


도덕과 주의가 인류의 이해의 표준에서 생기었다 하면 우리가 해를 피하고 이만 취함이 가할지니, 그러면 나라를 팔아 일신일가의 온포(溫飽)를 구함도 가할까? 한규설(韓圭卨)과 같이 이등(伊藤)의 호령에 소아처럼 울고 도주하여 재산의 문서를 안고 일생을 애첩의 품에서 보냄도 가할까? 일진회(一進會) 같이 합병을 선언하여 노예의 구생(苟生)을 취함도 가할까? 참정권 같은 것이라도 운동함이 가할까? 이러한 단시안(短視眼)의 이해는 이해가 아니다.

구복(口腹)을 충(充)할 수 있을지라도 인신(人身)이 구체(狗彘)로 타락된다 하면 이(利)가 아니라 해(害)뿐이며, 일신의 안락을 얻을지라도 부모·형제·자매·친척·목전의 동포·미래의 자손을 노적(奴籍)에 올릴진대 이 가 아니라 해 뿐이니, 그러므로 개인이 되어서는 이완용(李完用)이나 한규설(韓圭卨)이 되지 않고 민영환(閔泳煥)이 됨이며, 단체가 되어서는 일진회가 되지 않고 해산·체포 등을 당하는 단체가 됨이며, 

 

사회를 위하여는 미국 보호의 선정을 받느니보다 차라리 독립자유의 가정하(苛政下)에서 생활함을 좋아한다는 필리핀 모(某) 지사의 언설(言說)이 있으니, 이는 다 소극적 방면에서 타산한 이해요, 혹은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혹은 계급의 평등을 위하여 목전에 유혈천리 복시백만의 참해가 있음을 불고(不顧)하고, 미래의 실제상 혹 정신상의 어떠한 이익을 취하나니, 그러므로 성공한 러시아(露西亞[로서 아])의 공산당이나 실패한 아일랜드(愛爾蘭[애이란])의 싱픈 당이 같이 인류의 교훈을 끼침이니, 이는 적극적 방면에서 타산한 이해이다.

매양 목전의 이해만 타산하여 “인구감소의 화(禍)만 있으랴”하고 갑의 행동을 비난하며, “경제 손실의 해만 있으랴”고 을의 주장을 조소하는 자가 많으므로 이미 작고한 모(某) 공이 말하되 “나는 학자를 보기가 싫습니다. 누구의 무슨 경영에든지 학자들은 대소강약의 숫자적 비교의 안목으로 필패의 단안을 내립니다. 필패 필망(必敗必亡)할지라도 아니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줄은 요새 학자의 모르는 일입니다”하였다.

아! 목하(目下)에만 보이는 대소다과의 차이나 비교하는 단시안의 학자 야 무슨 학자이냐. 우리의 경우는 아무리 필성 필흥(必成必興)의 합리적·숙명적 의 운동이라도 최근의 단거리 이내에서는 실패뿐, 사망뿐일 것이 명백하다. 학자나 주의자나 운동자나 그가 그 같은 천근(淺近)한 언론행동을 버리어라. 그리하여 모 공의 천대영혼(泉臺英魂)의 회진(回嗔)을 받지 말지어 다.

 

3. 병을 따라 약을 쓰자

 


우리 조선이 고대부터 고정한 계급제가 있어 고구려의 오부(五部), 백제의 팔성(八姓), 신라의 삼골(三骨)이 모두 귀(貴)와 부를 소유한 자의 별명이다. 미천왕(美川王)이 어린 시절에 용노(傭奴)가 되어 주인의 안면(安眠)하기를 위하여 문 앞 못 속에 우는 개구리를 금지하노라고 밤을 새우며, 김유신의 대공으로도 왕경(王京) 귀족들이 한 자리에 앉지 않으려 한 모든 역사가 그 생활의 현수(縣殊)와 차별의 엄절(嚴絶)을 말한다. 우리 선민들이 이것을 타파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하여 반역혁명의 종적이 그 모호불비(模糊不備)한 역사의 기록 속에도 자주 출몰하였으나, 

 

당(唐)의 외구(外寇)가 여·제 양국을 유린하며 그 맹아가 최절(摧折)되며, 고려 일대에 더욱 양반 대 군주의 쟁투, 노예·잡류 대 양반의 쟁투에 누차의 유혈이 있었으나, 몽고의 외구가 침입하여 그 영향이 침적(沈寂)하였으며, 이태조가 고려대의 사제유폐(四制遺蔽)를 개혁하여 빈부의 조화를 도모하였으나, 그 귀천의 계급이 존재하므로 미구에 다시 그 하극(罅隙)이 폭열하여 소년계·검계(劍稧)·양반 살륙계 등 비밀혁명단체가 분기하더니 또한 임진난의 8년 병화로 말미암아 팔도가 창잔(瘡殘)함에 드디어 그 종자까지 멸절되었다.

이와 같이 사회 진화의 경로를 개척하려는 혁명이 매양 반혁명적 외구(外寇) 때문에 붕괴됨을 보면, 이제 송곳못으로 박을 땅도 없이 타인에게 빼앗기고, 소수의 소상업가들은 선진국 생산품의 수입을 소개하는 중간에서 떨어지는 밥풀을 주워 먹게 되고, 경찰들과 군대가 끊임없이 위압을 주는 판에서 사회의 조직부터 개혁하려 함은 너무 우거(愚擧)가 아닌가 한다. 오직 소작인의 운동 같은 것은 지주의 잔악을 저제(抵制)하여 일시의 급박한 동포의 궁민(窮民)을 구하는 유일 방법이니, 이는 시대 조류의 여택(餘澤)이 아니라 할 수 없다.

 

4. 유산자보다 나은 무산자의 존재를 잊지 마라

 

몇 년전 상해에서 《민중(民衆)》이란 주일신문에 어떤 문사가 이러한 논문을 썼다.

“조선인 중에도 유산자는 세력 있는 일본인과 같고, 일본인 중에도 무산자는 가련한 조선인과 한 가지니 우리 운동을 민족으로는 나눌 것이 아니요, 유무산으로 나눌 것이다.”

유산계급의 조선인이 일본인과 같다 함은 우리도 승인하는 바이거니와 무산계급의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본다 함은 몰상식한 언론인가 하니, 일본인이 아무리 무산자일지라도 그래도 그 뒤에 일본제국이 있어 위험이 있을까 보호하며, 재해에 걸리면 보조하며, 자녀가 나면 교육으로 지식을 주도록 하여, 조선의 유산자보다 호강한 생활을 누릴 뿐더러, 하물며 조선에 이식(移植)한 자는 조선인의 생활을 위혁(威嚇)하는 식민의 선봉이니, 무산자의 일인(日人)을 환영함이 곧 식민의 선봉을 환영함이 아니냐.

누백 년 비열한 외교하에서 생장한 식민들인 까닭에 무엇보다도 외교를 중시하여 매양 위급멸망의 제를 당하면 제3자에 대한 외교는 물론이거니와, 곧 위급멸망의 화를 가하려는 상대자에 대한 외교까지도 급급하여, 갑진(1904년) 을사(1905년)의 간에 일본정부에 올린 장서가 날로 날 듯하며, 일본인 통감 이등에게 바치는 공함이 빗발치듯하며, 5조약 체결할 더욱 가련하며, 

 

신구서적간 1권의 책자도 보지 않고, 다만 예배당의 찬미와 무쇠 주먹·돌근육의 광가(狂歌)로 생활하던 구청년의 거동도 찬허(讚許) 할 수 없지만, 정치적·경제적 현실의 고통에서 도탈(逃脫)하여 신시·신소설의 피난 생애로 일생을 마치려는 신청년의 심리야 참말로 애석할 만하다.

이 같은 퇴패(頹敗)한 지기(志氣)로는 설혹 학업을 성취할지라도 학교의 교사가 되거나 혹 외국인의 사회의 직원이나 되어 자기의 호구나 할 뿐이요, 설혹 해군·육군·비행대의 장교가 될지라도 그 소득의 월봉(月俸)으로써 자가의 온포(溫飽)나 경영하며 빈궁의 동포나 오시(傲視)하리니, 뜻없는 자의 지식이 쓸데 있으랴. 마치 민영휘의 금전이 공공운동에 쓸데없음과 일반일 것이다. 아아,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하노라〉란 논문의 세례를 받자! 이 글이 가장 병에 맞는 약방이 될까 한다.

 

6. 통척(痛斥)할 사회의 양대 악마


우리의 통척할 바는 (1)은 형식화니 ─ 삼강오륜이 지금에는 붕괴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이 되었지만, 조정암·김충암 등 기묘(1519년) 선현의 왕래한 서찰과 그들의 행사를 보면, 수천 년 구속(舊俗)을 소탕하고 공자 교화의 이상국을 건설하려던 진성(眞誠)과 세력을 흠복(欽服)할 만하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이매, 그 정신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아, 어떤 마누라의 상사(喪事)인지 모르고 통곡하는 충비(忠婢)도 있었다 하거니와, 눈물 한방울도 없이 3년 시묘(侍墓)하는 효자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성 말년 가가 효자 인인충신의 사회가 마침내 소수의 적신(賊臣)을 주멸(誅滅)하지 못 하였음은 정신없는 형식이 인세에 전쟁하는 무기가 아닌 까닭이다.

 

오늘날에 주의의 간판을 붙이며, 자유·개조·혁명의 명사 외우는 형식적 인물의 많음보다 주의대로 명사대로 혈전하는 정신적 인물이 하나라도 있어야 할 것이며, (2)는 피난의 심리나 ─ 온 조선 사람이야 다 죽든 말든 나 한 몸 한 가족이나 살면 그만이라고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十勝地)를 찾아다니는 치인(癡人)은 금일에 거의 절종되었겠지만, 그러나 그 심리는 의구하다. 

 

불평등한 이 세계를 한 번 뒤집어 모든 동포가 더 행복을 누리자는 심리가 아니요, 오직 한 몸 한 집을 살자는 생각으로 찾아가면 각 과학의 지식을 얻는 중학교·대학교…… 모든 학교도 정감록의 청학동이며, 시와 소설을 짓는 문단이나 논설 기사 등을 편집하는 신문사도 정감록의 철옹성이다. 난을 토평할 인물은 많이 나지 않고, 난을 피하는 인사만 있으면 그 난은 구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모두 피난심리의 대적을 토멸하여야 할 것이다.

위의 2대전에 성공하면 그 다음 위선위악(僞善僞惡)은 오히려 문제가 아니니 선과 악은 절대적이 아니요 상대적인 고로 악이 없으면 선도 없는 까닭에, ‘사회를 위하여 공을 못 이루거든 차라리 죄라도 지어라’할 것이다.

 

7. 문예운동의 폐해


낭만주의·자연주의·신낭만주의 등의 구별도 잘 못하는 자로, 현대에 가장 유행하는 굉굉(轟轟)한 서방 문예가들의 유명한 소설이나 극본 등을 거의 눈에 대어 보지 못한 완전히 문예의 문외한이, 게다가 10여 년 해외에 앉아, 조선 문단의 소식이 격절(隔絶)하여 무슨 작품이 있는지, 얼마나 나왔는지, 어떤 것이 환영을 받는지 알지 못하니, 어찌 조선 현재 문예에 대하여 가부를 말하랴.

다만 3·1운동 이래, 가장 현저히 발달된 자는 문예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제압박이 아무리 심하다 하나 아귀(餓鬼)의 금강산 구경 같은 문예작품의 독자는 없지 않으며, 경성의 신문지에 끼여오는 책사(冊肆)광고를 보면 다른 서적은 거의 15년 전 그때의 한 꼴이나 시인과 소설 선생의 작물(作物)은 비교적 다수인 듯하다. 그래서 나의 난필이 문예에 대하여 망논(妄論)을 한 마디 하려 하나 아는 재료가 없어 남의 말이나 소개하고 말려 한다.

일찍 중국 광동의 《향도(嚮導)》란 잡지에 그 호수가 몇 호인지 작자가 누구인지를 지금에 다 기억하지 못하는, 중국 신문예에 대한 탄핵의 논문이 났었는데, 그 대의를 말하면,

‘중국 년래에 제1혁명, 제2혁명, 5·4운동, 5·7운동…… 등이 모두 학생이 중심이었다. 그러더니 근일에 와서는 학생사회가 왜? 이렇게 적막하냐 하면, 일반 학생들이 신문예의 마취제를 먹은 후로 혁명의 칼을 던지고 문예의 붓을 잡으며, 희생유혈의 관념을 버리고 신시·신소설의 저자에 고심하여, 문예의 도원(桃源)으로 안락국(安樂國)을 삼는 까닭이다. 

 

몇 구의 시나 몇 줄의 소설을 지으면, 이를 팔아 그 생활비가 넉넉히 될 뿐더러, 또한 독자의 환영을 받아 시가라 소설가라 하는 명예의 월계관을 쓰며, 연애에 관한 소설을 잘 지으면, 어여쁜 여학생이 그 뒤를 따라 무한한 염복( 艶福)을 누리게 되므로, 혁명이나 다른 운동같이 체수(逮囚)와 포살(砲殺)의 위험은 없고, 명예와 안락을 얻으며, 연애의 단꿈을 이루게 되므로, 문예의 작자가 많아질수록 혁명당이 적어지며, 문예품의 독자가 많을수록 운동가가 없어진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에, 3·1운동 이후에, 침적(沉寂)하여진 우리 학생 사회를 연상하였다. 중국은 광대 침흑(沉黑)한 대륙인 고로, 한 가지의 풍조로써 전국을 멍석말이할 수 없는 나라이거니와, 조선은 청명 협장(狹長) 한 반도인 고로 한 가지의 운동으로 전사회를 꽂감꼬치 꿰듯 할 수 있는 사회니, 즉 3·1운동 이후 신시·신소설의 성행이 다른 운동을 초멸(剿滅)함이 아닌가 하였다.

 

8. 예술주의 문예와 인도주의의 문예에 어떤 것이 옳은가

 


전술과 같이, 설혹 신시와 신소설이 성행하는 까닭에 사회의 모든 운동이 침적(沉寂)하다 할지라도, 만일 순예술주의자들로 말하면, ‘빈처(貧妻)의 단속곳을 팔아서라도 훌륭한 몇 짝의 신시를 삼이 가하며, 강토의 전부를 주고라도 재미있는 몇 줄의 신소설을 바꿈이 가하다’하리니, 그까짓 운동의 침적 여부야 누가 알겠느냐? 하리라.

존화주의(尊華主義)를 위하여 조선이 존재하며, 삼강오륜을 위하여 인민이 존재하며, 권선징악을 위하여 역사와 소설이 존재하며 기타 모든 것이 자(自)의 존재할 목적이 없이 타(他)의 무엇을 위하여 존재한 줄로 단정한, 누백 년 이래 노예사상에 대한 반감으로는, 현 세계의 인도주의 문예가 예술주의 문예를 대신하려 함에 불구하고, 나는 곧 예술지상주의도 찬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술도 고상하여야 예술이 될지어늘, 환고(紈袴) 낭자의 육노(肉奴)가 되려는 자살혼의 강명화(康明花)도 열녀되는 문예가 무슨 예술이냐,누백 년의 아귀(餓鬼)를 곁에다 두고 1원 내지 5원의 소설책이나 팔아 일포(一飽)를 구하려는 문예가들이 무슨 예술가이냐, 금강(金剛)의 경(景)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기아(棄兒)의 눈에는 한 숟가락(一匙[일시])의 밥(飯[반]) 만 못하며, 

 

솔거(率居)의 화송(畵松)이 아무리 명작이라 할지라도 익수자(溺水者)의 눈에는 일편의 목판만 못하며, 살도 죽도 못하게 된 조선 민중의 귀에는 모든 미려한 가극과 소설의 이야기가 백두산 속 미신귀(迷信鬼)인 조선생(趙先生)의 강신필만 못하리니, 1원이면 한 집 인구의 며칠 생활할 민중의 눈에 들어갈 수도 없는 2원 3원 고가(高價)되는 소설을 지어놓고 민중문예라 부르는 것도 얄미운 짓이거니와 민중생활과 접촉이 없는 상류 사회 부귀가(富貴家) 남녀의 연애 사정을 그리므로 위주하는 장음(獎淫) 문자는 더욱 문단의 수치이다. 

 

예술주의의 문예라 하면 현 조선을 그리는 예술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인도주의의 문예라 하면 조선을 구하는 인도가 되어야 할 것이니, 지금에 민중에 관계가 없이 다만 간접의 해를 끼치는 사회의 모든 운동을 소멸하는 문예는, 우리의 취할 바가 아니다. 구주 각국에는 매양 문예의 작물이 혁명의 선구가 되었다 하나, 이는 그 역사와 환경이 다른 까닭이니 조선의 현재에 비할 것이 아니다.

(북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