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온고지신(溫故知新)
溫(익힐 온) 故(옛 고) 知(알 지) 新(새 신)
≪논어論語≫<위정爲政>편에서 공자는 [옛 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因果) 관계 속에서 발전의 원리를 깨달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옛 것과 새로운 것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은 대립과 단절만을 만들어낸다. 구세대와 신세대, 여기에 쉰 세대와 낀 세대, X세대와 Z세대라는 표현들은 모두 지혜롭지 못한 생각에서 나온 말들이다. 올챙이를 한자로 [과두(?層)]라고 하고, 올챙이 적을 가리켜 [과두시절(?層時節)]이라 한다. 올챙이 없는 개구리, 개구리 없는 올챙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선인들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는 고사성어(故事成語)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반성과 발전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는 가장 적절한 [溫故知新]의 도구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우리말의 [복습(復習)]을 [온습(溫習)]이라 표현하고 있으니, 이는 배운 것을 익히고 또 익혀 늘 가슴 속에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새로이 [고사성어(故事成語)]란을 집필함에 있어, 짧지만 깊은 옛 사람들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
002.
후안무치(厚顔無恥)
厚(투터울 후) 顔(얼굴 안) 無(없을 무) 恥(부끄러워할 치)
옛날 중국의 하나라 계(啓) 임금의 아들인 태강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다가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 난다. 이에 그의 다섯 형제들은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노래는 모두 ≪書經≫의 <五子之歌>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막내가 불렀다고 하는 노래에는 이러한 대목이 보인다.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섧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누나.
萬姓仇予, 予將疇依. 鬱陶乎予心, 顔厚有??.
[厚顔]이란 [두꺼운 낯가죽]을 뜻하는데, 여기에 [무치(無恥)]를 더하여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로 자주 쓰인다. 이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지난 주 동안, 한보청문회에 모습을 드러낸 증인들 중에는 [후안(厚顔)]을 무기로 나온 이들이 많았다.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수치(羞恥)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만백성들은 지금 그들이 태강의 동생들이 불렀다는 이 노래를 한번만이라도 읊조려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003.
난신적자(亂臣賊子)
亂(어지럽힐 란) 臣(신하 신) 賊(해칠 적) 子(아들 자)
≪孟子≫<등문공?文公>하편에는 맹자의 제자인 공도자가 제기한 논쟁에 관한 맹자의 답변이 실려 있다. 맹자는 자신이 논쟁을 피하지 않는 이유를 인의(仁義)의 실천을 위한 것으로 설명하였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은 두려워 하였다(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라는 구절이 나온다. ≪후한서≫<동탁전董卓傳>에도 [너희들은 반역하여 천자를 핍박하니, 역적들중에도 이제껏 너희같은 자들은 없었다(亂臣賊子未有如汝者)]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亂臣賊子]란 [임금을 죽이는 신하와 어버이를 죽이는 아들] 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나 역적] 등의 뜻이다. 옛날 영국에서는 국사범들을 런던탑(the Tower of Londen)에 감금하였는데, 이 탑의 Thames강 쪽의 문을 [the Traitor's Gate]라 하였다. 이는 곧 [亂臣賊子之門]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많은 [亂臣賊子]들이 탄생과 함께 이슬로 사라져 갔지만, 여전히 기억속에 살아있는 [난신(亂臣)]의 탄생은 불과 18년전인 1979년 [10월 26월]에 있었다. 하지만 한 시기에 [亂臣]과 [賊子]의 출현을 모두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004.
신출귀몰(神出鬼沒)
神(귀신 신) 出(날 출) 鬼(귀신 귀) 沒(없어질 몰)
≪회남자淮南子≫<병략훈兵略訓>에는 [교묘한 자의 움직임은 신이 나타나고 귀신이 걸어가는 듯하며(神出而鬼行), 별이 빛나고 하늘이 운행하는 것 같아, 진퇴 굴신의 조짐도 나타나지 않고 한계도 없어, 난조(鸞鳥:전설 속의 새이름)가 일어나듯, 기린이 떨치고 일나는 듯, 봉황새가 날 듯, 용이 오르듯, 추풍과 같이 출발하여 놀란 용과 같이 빠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적으로 하여금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하도록 철저한 보안 유지나 위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神出鬼沒]이란 바로 [神出而鬼行]이라는 구절에서 연유된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뜻이며, 행동이 신속하고 그 변화가 심하여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神出鬼沒]했던 홍길동의 출생지를 놓고 요즈음 관련 지방 자치단체들의 논쟁이 매우 진지하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일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거니와, 귀신 같은 양반을 서로 모시겠다고 열을 올리는 후손들의 [길동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시대적 해결사의 출현]을 고대하는 우리들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이리라.
005.
정중지와(井中之蛙)
井(우물 정) 中(가운데 중) 之(갈 지) 蛙(개구리 와)
≪장자莊子≫<추수편秋水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황하의 신(神) 하백(河伯)은 가을 홍수로 황하의 물이 불어나자 기뻐하며 천하의 훌륭함이 모두 자기에게 모여있다고 생각하였다. 물을 따라 동해의 북쪽 바다에 이르자 하백은 바다의 위세에 눌려 한숨을 지었다. 그러자 북해의 신(神)인 [약(若)]은, "우물 속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그가 좁은 곳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오(井蛙不可以語於虛也, 拘於虛也). 지금 당신은 대해를 보고 비로소 자신의 꼴불견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대도의 이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井中之蛙]란 우물 안의 개구리, 즉 생각이나 식견이 좁은 사람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井蛙不知大海]라거나 [井底蛙]라는 표현도 모두 같은 의미이다.
얼마전 까지만해도 [Globalization]인지 [세계화]인지를 외치며 [우물 안의 개구리]소탕을 선도했던 사람을 요즘 들어선 보기 어렵다. 뜬금없이 우물 밖으로 나가라 하니, 영어 과외가 급증하지 않고 국제 공항이 붐비지 않고서야,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006.
조장(助長)
助(도울 조) 長(길 장)
≪孟子≫<공손추公孫丑>상편에는 공손추와 맹자의 문답이 실려 있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고 나서, 순리(順理)와 의기(義氣)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송(宋)나라의 한 농부의 조급한 행동을 예로 들었다. 그 농부는 자기가 심은 곡식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 싹들은 뽑아 올렸으나, 그 싹들은 모두 말라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리해서라도 잘 되게 하려고 했던 농부의 행동은 오히려 무익(無益)의 정도를 넘어서 해악(害惡)이 되었던 것이다.
[助長]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도와서 성장시키다]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쓸데없는 일을 해서 일을 모두 망쳐버리다]라는 부정적 의미가 훨씬 강하다.
싹과 같은 우리의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그리고 과외 학원을 전전하며 뿌리가 흔들리도록 [助長]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맹자는 아이들을 가르침에 [마음을 망령되이 갖지 말며(心勿忘), 무리하여 잘 되게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勿助長也)]고 우리 어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날 하루 만이라도 마음껏 놀도록 아이들을 [助長]해 보았으면.
007.
도룡지기(屠龍之技)
屠(잡을 도) 龍(용 룡) 之(갈 지) 技(재주 기)
≪장자莊子≫<열어구편列禦寇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있다.
장자는 [주팽만은 용을 죽이는 방법을 지리익에게서 배우는데, 천금이나 되는 가산(家産)을 탕진하고 삼 년만에야 그 재주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써먹을 곳이 없었다(朱磨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 三年成技, 而無所用其巧). 성인은 필연적인 일에 임할 때에도 필연으로 여기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다툼이 없지만 범속한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마음속에 다툼이 많다.]라고 말하며, 소인들은 사소로운 일에 얽매여 대도(大道)를 이룰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屠龍之技]란, 곧 많은 돈과 세월을 투자하여 배웠으나 세상에서 써먹을 데가 없는 재주를 말한다. 본시 [龍]이란 상상 속의 동물일뿐이니, 주팽만이 고생 끝에 배운 기술은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것이다.
[九龍]이다 [二龍]이다 해서 먼저 승천(昇天)하려고 다투는 용들이 유독 많은 것도 요즈음 들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들은 모두 승천하는 기술과 용 잡는 기술을 연마하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다. 주팽만의 [屠龍之技]가 진가를 발휘하여, 용의 눈물이 그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008.
호가호위(狐假虎威)
狐(여우 호) 假(빌릴 가) 虎(범 호) 威(위엄 위)
≪전국책戰國策≫<초책楚策>에는 기원전 4세기 초, 중국의 전국시대 초나라의 선왕(宣王)이 위(魏)나라 출신의 신하인 강을(江乙)에게 북방 강대국들이 초나라 재상(宰相)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 하는 이유를 묻는 대목이 실려 있다.
강을은 [여우와 호랑이의 고사]를 인용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즉, 짐승들이 두려워 한 것은 여우가 아니라 그의 뒤에 있던 호랑이였다는 것이다. 이는 북방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 재상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선왕의 강병(强兵)임을 비유한 것이었다.
이렇듯 [狐假虎威]란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권세나 배경을 빌어 위세 부리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狐假虎威]를 일러 영어로는 [an ass in the lion's skin(사자의 탈을 쓴 나귀)]이라고 하였던가. 하지만 죽은 사자의 탈을 쓴 나귀보다는 살아있는 호랑이를 꼬여 뭇 짐승들을 속인 여우쪽이 훨씬 교활하고 가증스럽다. 여우 같은 사람과 여우의 잔꾀에 속아 넘어간 눈먼 호랑이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는 전에 없이 뒤숭숭한 것이다.
009.
烏鳥私情(오조사정)
烏(까마귀 오) 鳥(새 조) 私(사사 사) 情(뜻 정)
진(晋)나라 사람 이밀(李密)이 쓴 <진정표陳情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실려있다. 이 글은 조모 유씨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밀이 부득이 관직을 사양하게 됨을 황제께 고하는 글이다.
[저는 조모가 안계셨더라면 오늘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며, 조모께서는 제가 없으면 여생을 마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금년 44세이고, 조모 유씨는 96세이니, 제가 폐하게 충성을 다할 날은 길고 조모 유씨에게 은혜를 보답할 날은 짧습니다. 까마귀가 어미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 까지만 봉양하게 해 주십시오(烏鳥私情, 願乞終養).]
이밀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하씨가 개가하자,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며, 효심이 두터워서 할머니의 병 간호를 하고자 황제가 내린 관직을 물리쳤다. [烏鳥私情]이란 까마귀가 자라면 그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듯 그처럼 [부모를 모시는 지극한 효심]을 이르는 말이다. 옛부터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읽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고, 이밀의 <陳情表>를 읽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손자의 카네이션 한 송이가 돋보이는 특별한 어버이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010.
鼓腹擊壤(고복격양)
鼓(두드릴 고) 腹(배 복) 擊(부딪칠 격) 壤(흙 양)
≪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요(堯)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지난 어느 날 민심을 파악하고자 천한 옷을 입고 시내를 돌았을 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요임금은 거리에서 아이들이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조금 후에는, 한 노인이 무언가를 먹으면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鼓腹), [격양] 놀이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노인은 [해가 뜨면 들에 밭을 갈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네. 샘을 파서 물을 마시고 농사지어 먹고 사니,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리오.]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정치가 잘 되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직접 확인한 요 임금은 흐뭇한 마음으로 궁으로 돌아 왔다.
[鼓腹]은 [부른 배를 두드리다]라는 뜻이다. [壤]은 본시 나무로 만든 신발모양의 놀이 도구이며, 30-40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것을 서로 맞치는 놀이를 [격양擊壤]이라 했다. 따라서 [鼓腹擊壤]은 [부른 두드리며 양 치기 놀이를 하는 것]인데, 이는 곧 [太平聖代(태평성대)]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저 잘 먹고 골프 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태평성대일 수는 없다. [鼓腹擊壤]은 진정 마음까지 편안한 시대에라야 어울리는 말이다.
011
西施?目(서시빈목)
西(서녘 서) 施(베풀 시) ?(찡그릴 빈) 目(눈 목)
≪莊子≫<천운편天運篇>에는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나온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서시가 가슴을 앓아 눈을 찡그리고 있으니, 그 마을의 다른 추녀(醜女)가 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와서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찡그렸다(西施病心而?, 其里之醜人, 見而美之, 歸亦捧心而?).] 그 결과 어떤 이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그 마을을 떠나버렸다.
이 이야기는 공자의 제자인 안연과 악관(樂官)인 [金]이라는 사람이 나누는 대화중에 나온다. 장자는 당시 주(周)왕조에서 이상정치를 재현하려는 것을 서시의 찌푸림을 본받는 추녀의 행동같은 것으로서 사람들의 놀림받는 쓸데 없는 짓이라 여겼던 것이다.
[西施?目(서시가 눈을 찡그리다)]이란 [아무런 비판 없이 남을 흉내 내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효빈(效撒:눈쌀 찌푸림을 흉내내다)]이라고도 한다. 맹신(盲信)과 맹목적 추종은 그 추녀다운 사고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유행에 민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주관(主觀)과 합리적 비판에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012
苛政猛於虎(가정맹어호)
苛(매울 가) 政(정사 정) 猛(사나울 맹) 於(어조사 어) 虎(범 호)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태산 기슭을 지나고 있는데, 한 부인이 무덥 앞에서 울며 슬퍼하고 있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에게 그 까닭을 묻게 하였다. 그 부인은 대답하길 [오래전에 시아버님이 호랑이게 죽음을 당하였고, 저의 남편 또한 호랑이에게 변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의 아들마저 호랑이게 목숨을 잃게 되었답니다.]라고 하였다.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말에 그 부인은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無苛政).]라고 짧게 대답하였다. 자로의 말을 듣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잘 알아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다(苛政猛於虎也).]라고 하였다.
춘추 말엽 노(魯)나라의 대부 계손자(系孫子)의 폭정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은 차라리 호랑이에게 물려죽는 쪽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苛政]이란 [번거롭고 잔혹한 정치]를 뜻한다. [政]을 [徵(징)]의 차용으로 보아 [번거롭고 무서운 세금과 노역]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잔혹한 정치, 무거운 세금이나 노역은, 결국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에게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들이다.
013
家貧思良妻(가빈사양처)
家(집 가) 貧(가난할 빈) 思(생각할 사) 良(좋을 량) 妻(아내 처)
사기史記 위세가魏世家에는 위나라 문후文侯가 재상 임명을 위해 이극(李克)에게 자문을 요청하면서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위문후는 이극에게 말하길, [선생께서 과인에게 말씀하시길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그리게 되고, 나라가 혼란하면 훌륭한 재상을 그리게 된다(家貧思良妻, 國亂思良相)'라고 하셨습니다. 제 동생인 성자(成子)와 적황(翟璜) 중, 어떤 이가 적합합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극은 문후에게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사항을 진언한다. [평소에 지낼 때는 그의 가까운 사람을 살피고, 부귀할 때에는 그와 왕래가 있는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사람을 살피고, 곤궁할 때에는 그가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에는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
위나라 재상이 된 사람은 바로 성자(成子)였다. 비록 문후의 동생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소득 중 10%만을 생활에 쓰고, 나머지 90%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어진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어진 재상]으로서도 적임자였던 것이다. [家貧思良妻]나 [國亂思良相]이라는 말은 모두 [어려운 시기에는 유능하고 어진 인재가 필요하게 된다]것을 뜻한다.
014
肝腦塗地(간뇌도지)
肝(간 간) 腦(뇌 뇌) 塗(칠할 도) 地(땅 지)
사기(史記) 유경열전(劉敬列傳)에는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유경의 대화가 실려 있다. 유경은 고조에게 [폐하께서는 촉땅과 한을 석권하고, 항우와 싸워 요충지를 차지하도록까지 대전(大戰) 70회, 소전(小戰) 40회를 치렀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간과 골이 땅바닥을 피칠하게 되었고, 아버지와 자식이 들판에서 해골을 드러내게 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使天下之民, 肝腦塗地, 父子暴骨中野, 不可勝數).]라고 하였다.
유경은 덕치(德治)가 이루어졌던 주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한나라 고조는 많은 전쟁을 치르며 땅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발생할 반발세력의 저항이나 외부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고조에게 옛 진나라의 요충지인 함양(咸陽)을 도읍으로 정하도록 충고하였던 것이다.
[肝腦塗地(간과 뇌가 흙과 범벅이 되다)]란 전란(戰亂)중의 참혹한 죽음을 형용한 말이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속에서 인간들이 겪어야하는 죽음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것이리라. 지난 주 TV에 보도되었던 르완다 사람들의 [죽음의 귀향 열차 91명 압사]라는 화면은 [肝腦塗地]를 연상케 하였다.
015
靑出於藍(청출어람)
靑(푸를 청) 出(날 출) 於(어조사 어) 藍(쪽 람)
≪순자荀子≫<권학편勸學篇>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군자가 말하길, 배움은 그쳐서는 아니된다. 푸른색은 쪽풀에서 취하였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며,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라고 하였다(學不可以己. 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성악설을 주장한 전국시대의 학자 순자는 남풀과 청색, 그리고 물과 얼음의 비유로써 교육에 의한 인성의 교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고 이(利)를 탐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므로, 스승의 가르침과 예의로써 이를 교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藍]이란 본시 그 잎으로 남색 염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식물의 이름이다. [남풀]에서 챙색을 추출하는 과정이나 물이 얼음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곧 [교육]을 비유한 것이니, [靑出於藍]이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게 변화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出藍]이라는 표현도 같은 뜻이다.
진정으로 [남풀]과 [물]의 역할을 하는 스승, [챙색]과 [얼음]으로 변화된 제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靑出於藍]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스승의 날]이 되었으면 한다.
016
三人成虎(삼인성호)
三(석 삼) 人(사람 인) 成(이룰 성) 虎(범 호)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에는 위나라 혜왕(惠王)과 그의 대신 방총이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방총은 태자를 수행하고 조(趙)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없는 사이에 자신을 중상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위 혜왕에게 몇 마디 아뢰게 된다.
[만약 어떤이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위 혜왕은 [그걸 누가 믿겠는가?]라고 하였다. 방총이 다시 [다른 사람이 또 와서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왕은 [그렇다면 반신반의하게 될 것이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방총이 [세 사람째 와서 똑같은 말을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왕은 곧 [과인은 그것을 믿겠네.]라고 하였다. 이에 방총은 [시장에 호랑이가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三人言而成虎).]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을 중상모략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기를 청하였다.
[三人成虎]란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들이 말하게 되면 진실처럼 들리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사회의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말들이 혹시 진짜 호랑이를 만들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017
一刻三秋(일각삼추)
一(한 일) 刻(새길 각) 三(석 삼) 秋(가을 추)
시경(詩經) 왕풍(王風)에는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채갈(采葛)]이라는 시(詩)가 있다.
[그대 칡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석달이나 된 듯하고(彼采葛兮 一日不見 如三月兮), 그대 대쑥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아홉달이나 된 듯하고(彼采蕭兮 一日不見 如三秋兮), 그대 약쑥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세 해나 된 듯하네(彼采艾兮 一日不見 如三歲兮).]
고대 중국에서는 일주야(一晝夜)를 일백각(一百刻)으로 나누었는데, 절기(節氣)나 주야(晝夜)에 따라 약간 다르다. 예컨대, 동지에는 낮이 45각, 밤이 55각이었고, 하지에는 낮 65각, 밤 35각이었다. 춘분과 추분에는 낮이 55각반이었고, 밤은 44각반이었다. 청(淸)대에 이르러서는 [시종(時鐘)]으로 시간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현대 중국어에서는 15분을 [一刻]이라 한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一刻]이라는 말로써 매우 짧은 시간을 표현하였다. [一刻三秋]나 [一刻如三秋(일각여삼추)]라는 말은 이 시의 [一日三秋]라는 표현에서 유래된 것으로 모두 같은 의미이다. [一刻三秋]란 짧은 시간도 삼년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함을 나타낸 말이다.
018
蓋棺事定(개관사정)
蓋(덮을 개) 棺(널 관) 事(일 사) 定(정할 정)
두보(杜甫)가 사천성(四川省)의 한 산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이다. 마침 그곳에는 자신의 친구 아들인 소계(蘇係)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는 소계에게 한 편의 시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의 [군불견 간소계(君不見 簡蘇係)]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길 가에 버려진 못을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되어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만들어지며 / 조그만 물웅덩이 속에도 큰 용이 숨어 있을 수 있네. / 장부는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되는 법이네(蓋棺事始定) / 그대는 다행히도 아직 늙지 않았거늘.....]
이 시를 읽은 소계는 후에 그곳을 떠나 호남 땅에서 설객(說客)이 되었다고 한다. [蓋棺事定]이란 [죽어서 관의 뚜껑을 덮은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죽은 이의 업적을 찬양하기도 하고, 생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80년 5월에 관 뚜껑이 덮혀졌던 많은 이들, 그들은 거의 20년만에야 자신들의 자리가 정해지게 된 셈이다.
019
一葉知秋(일엽지추)
一(한 일) 葉(잎 엽) 知(알 지) 秋(가을 추)
회남자 설산훈(說山訓)에는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해가 장차 저물려는 것을 알고(見一落葉而知歲之將暮), 병 속의 얼음을 보고 천하에 추위가 닥쳐옴을 아는 것은 가까운 것으로써 먼 것을 논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나라 한 시인의 시(詩)에는 [떨어지는 잎새 하나로 천하가 가을임을 알다(一落葉知天下秋).]라는 구절이 보인다.
[一葉知秋]는 [하나의 낙엽을 보고 곧 가을이 왔음을 알다]라는 뜻이다. 이는 사소한 것으로써 큰 것을 알며, 부분적인 현상으로써 사물의 본질이나 전체, 발전 추세 등을 미뤄 알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우리들은 정치와 경제에서, 그리고 교육에서도 낙엽들을 보았으며, 지금도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이 떨어지는 많은 잎사귀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서양 속담에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여름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성급한 판단을 삼가라는 뜻이다. 지금 몇몇의 낙엽들이 눈에 띄인다고 해서 가을과 겨울의 뒤를 이어 나타날 봄까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一葉知秋]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以偏槪全(이편개전)], 즉 [반쪽으로써 전체를 짐작하다]라는 말이 있다.
020
佳人薄命(가인박명)
佳(아름다울 가) 人(사람 인) 薄(엷을 박) 命(목숨 명)
소동파(蘇東坡)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송대(宋代)의 시인 소식(蘇軾)은 진사, 학사, 예부상서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정치적으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는데, 이러한 환경은 그로 하여금 심도 있는 작품을 쓰게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佳人薄命]이라는 말은 그의 칠언율시 [박명가인(薄命佳人)]에 나온다.
[두 볼은 엉긴 우유빛 머리는 옻칠한 듯 검고 / 눈빛이 발에 비추어 구슬처럼 반짝인다. / 하얗고 하얀 비단으로 선녀의 옷을 지어 입고 / 타고난 바탕을 더럽힐까 입술연지는 바르지 않았네. / 오나라 사투리의 예쁜 목소리 앳되기만 한데 / 한없는 근심은 전혀 알 수 없네. /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自古佳人多命薄) / 문을 닫은채 봄이 지나가면 버들꽃도 떨어지리.
본래 이 시에서는 [佳人命薄]이라 하였으나 후에는 [佳人薄命]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美人薄命(미인박명)]이라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佳人薄命]이란 [미모가 뛰어난 여자는 그 운명이 기구하거나 길지 못함]을 뜻하는 말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뜯어고친 여인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들은 외모를 위해 수명과 운명이라는 내실(內實)을 포기한 것일까.
021
一木難支(일목난지)
一(한 일) 木(나무 목) 難(어려울 난) 支(지탱할 지)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편(任誕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위(魏)나라 명제(明帝)의 사위인 임개(任愷)는 가충(賈充)이라는 사람과의 불화로 그만 면직당하고 말았다. 그는 권세를 잃게 되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임개의 친구인 화교(和嶠)에게 말하길 "당신은 어찌 친구인 임개의 방탕함을 보고도 구하지 않고 좌시만 하는거요?"라고 물었다.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던 화교는 "임개의 방탕은 마치 북하문(北夏門)이 무너질 때와 같아서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쳐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오(非一木所能支)."라고 대답하였다.
[一木難支]는 [一柱難支(일주난지)]라고도 하는데, 이는 큰 집이 무너지는 것을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치지 못하듯 [이미 기울어지는 대세를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개인의 경우 방탕함으로 얻게되는 최후의 결과는 망신(亡身)이고, 나라의 경우에는 망국(亡國)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방탕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 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썩지 않을 충실한 기둥을 하나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022
徙木之信(사목지신)
徙(옮길 사) 木(나무 목) 之(갈 지) 信(믿을 신)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정치가인 상앙(商椽)의 법령 시행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상앙은 새로운 법을 정하였으나,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는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남문(南門)에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十金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감히 옮기지 않았다. 상앙이 다시 五十金을 내걸자, 한 사나이가 나타나 그것을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시 그에게 상금을 주어 거짓이 아님을 내보였다. 이렇게 하여 신법을 공포하였는데, 일년후 백성들이 그 법령의 불편한 점을 고하며 도성으로 몰려왔다. 이때 태자(太子)가 그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범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태자의 보좌관과 그의 스승을 처형하였다. 이후 백성들은 기꺼이 법령을 준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徙木之信]이란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는 것을 뜻하며, [移木之信(이목지신)]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정치인들도 상앙의 [徙木之信]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야 하며, 만든 법은 자신들부터 반드시 지키겠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023
一饋十起(일궤십기)
一(한 일) 饋(먹일 궤) 十(열 십) 起(일어날 기)
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에는 우(禹) 임금의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우 임금은 자신에게 도(道)로써 가르칠 사람은 와서 북을 울리고, 의(義)로써 깨우치려는 자는 와서 종을 치며, 어떤 일을 고하고자 하는 자는 방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경쇠를 치며, 소송할 일이 있는 자는 와서 작은 북을 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우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 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一饋而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一饋十起]란 [일이 몹시 바빠서, 한 끼 밥을 먹는데도 도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야 했음]을 뜻한다. 이는 곧 통치자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각별한 열성(熱誠)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는 [一饋十起]하면서 열성적으로 국민을 위해 일했던 통치자가 몇이나 있었으며, 그리고 통치자들 때문에 국민들이 끼니를 건너 뛰어야만 했던 적은 몇 번이나 있었을까?
024
七步成詩(칠보성시)
七(일곱 칠) 步(걸음 보) 成(이룰 성) 詩(시 시)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편에는 위(魏) 문제(文帝)인 조비(曹丕)와 그의 동생인 동아왕(東阿王) 조식(曹植) 간에 일어난 고사가 실려 있다.
문제는 동아왕에게 일곱 걸음을 떼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하면서(文帝嘗令東阿王七步作詩), 못지을 경우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동아왕은 대답을 마치자 마자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콩을 삶아 콩국을 끓이고 콩물을 짜서 즙을 만드네. 콩깍지는 솥 아래서 불에 타고 콩은 솥 안에서 눈물짓네. 본시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서로 지저댐이 어찌 이리도 급할까!] 문제는 조식의 이 시를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고 한다.
조조(曹操)와 그의 큰 아들인 조비, 셋째 아들인 조식은 중국 문학에서 [삼조(三曹)]라 칭하는 유명한 문장가들이다. 이들중 조식의 시재(詩才)가 특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비는 천자(天子)가 된 후에도 조식에 대한 시기심이 변하지 않았다. 조비는 조식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죽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서 이러한 시를 짓게 했던 것이다. [七步成詩]는 [문재(文才)가 민첩함]을 말하며, [칠보재(七步才)]란 [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025
塗炭之苦(도탄지고)
塗(진흙 도) 炭(숯 탄) 之(갈 지) 苦(괴로울 고)
서경(書經) 중훼지고(中紅之誥)에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어진 신하였던 중훼가 탕왕에게 고하는 글이 실려있다. 탕왕은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을 늘 괴롭게 여기고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구실 삼을까 염려하였다. 중훼는 이러한 탕왕의 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아뢰어 그를 격려하였다.
[하늘은 총명한 이를 내셔서 이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夏)나라 임금은 덕에 어두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民墜塗炭), 하늘은 이에 임금님께 용기와 지혜를 내리시어, 온 나라의 의표가 되어 바로 다스리게 하시어, 우(禹)임금의 옛 일을 계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법을 따라서 하늘의 명을 받드시는 것입니다.]
[塗]는 진흙을 뜻하고 [炭]은 [숯불]을 뜻하니, [塗炭之苦]란 [진흙수렁이나 숯불에 빠진 것과 같은 괴로움]을 말한다. 이는 재난(災難) 등으로 몹시 곤란한 처지에 빠져있음을 나타낸다. 북한의 어려운 형편을 묘사함에 [도탄(塗炭)]이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은 지금 [塗炭之苦]를 겪고 있는 것이다.
026
刻舟求劍(각주구검)
刻(새길 각) 舟(배 주) 求(구할 구) 劍(칼 검)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편(察今篇)에는 융통성 없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의 한 사나이가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 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칼을 그만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다른 칼을 꺼내어 그 배의 옆부분에 칼 빠뜨린 곳이라는 자국을 새기면서(遽刻其舟) [여기는 내 칼이 빠진 곳]이라고 말했다. 배가 목적지에 이르자, 그는 자신이 새겨 놓았던 곳을 따라 물 속으로 뛰어들어 그 칼을 찾으려 했다(求劍). 그러나 자신이 탔던 배는 칼을 빠뜨린 곳을 지나 계속 이동하여 왔으므로, 그가 칼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刻舟求劍]이란 [뱃전에 새겨놓은 표시만을 믿고 물에 빠뜨린 칼을 찾으려함]을 뜻한다. 이는 곧 [시세(時勢)나 세상 형편에 어둡거나 고지식함]을 비유한 말이다. 법 조항이나 문구(文句)에 얽매어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경우에도 [刻舟求劍]이라는 말은 들어 맞는다.
이렇듯 현실 감각이나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 반대로 시류(時流)에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약삭 빠르게 앞서 가는 사람은 대사(大事)를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027
鷄口牛後(계구우후)
鷄(닭 계) 口(입 구) 牛(소 우) 後(뒤 후)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에는 전국(戰國)시대의 모사(謀士) 소진의 일화가 실려 있다. 소진은 합종책(合從策)으로 입신(立身)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진(秦)나라 혜왕, 조(趙)나라의 재상인 봉양군 등을 만나 보았으나 환영 받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연(燕)나라로 가서 문후(文侯)를 만나, 연나라가 조(趙)나라와 맹약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해야한다는 합종의 계획을 말하였다. 문후의 후한 사례에 고무된 소진은 얼마 후 한(韓)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한나라의 선혜왕(宣惠王)을 만나 진나라를 섬기지 말 것을 권고하며 다음과 같이 유세하였다. [이번 기회에 남북으로 연합하는 합종책으로써 진나라의 동진(東進)을 막아보십시오. 옛말에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말라(寧爲鷄口無爲牛後).}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선혜왕은 소진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나머지 다섯 나라들도 그에게 설복되었으며, 결국 소진은 6국의 재상을 겸임하게 되었다.
[鷄口牛後]란 [큰 집단의 말단보다는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대선(大選)이 가까워지면서 [鷄口]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맛으로 치자면 [꼬리곰탕]이 훨씬 나은 것을......
028
食言(식언)
食(먹을 식) 言(말씀 언)
서경(書經) 탕서(湯誓)에는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하려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맹서가 기록되어 있다.
탕왕은 박(憎)땅에서 출전에 앞 둔 전군(全軍)에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나는 감히 난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하나라의 임금이 죄가 많아 하늘이 명하시니 그를 치려는 것이오. 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니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소. 하나라 임금은 백성들의 힘을 빠지게 하고, 하나라 고을을 해치게만 하였소.] 탕왕은 하나라 걸왕의 죄상을 설명하며, 계속하여 정벌의 불가피함을 외친다. [바라건대 나를 도와 하늘의 법이 이루어지도록 하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니, 여러분들은 믿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爾無不信).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오(朕不食言).] 그리고 그는 자신의 처자식의 목숨을 담보로 제시한다.
[食言]이란 밥이 뱃속에서 소화되어 버리듯 [약속을 슬그머니 넘겨 버리는 것]이니, 이는 곧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거짓을 말함]을 뜻한다.
[떡값] 받아 떡을 사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선거 때 내뱉었던 [공약의 말(言)]까지도 깡그리 먹어치우는 이들은 탕왕에게서 신의(信義)를 배워야 한다.
029
越俎代庖(월조대포)
越(넘을 월) 俎(도마 조) 代(대신할 대) 庖(부엌 포)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는 요(堯)임금과 기산에 숨어 살았다는 은자(隱者) 허유(許由)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요임금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이야기 하며 허유에게 천하를 맡아줄 것을 권유한다. [일월(日月)이 밝은데 횃불을 계속 태우면, 그 빛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때 맞추어 비가 내리는데 여전히 물을 대고 있으니 그 물은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부족하오니, 부디 천하를 맡아 주십시오.]
이러한 요임금의 권유에 허유는 뱁새와 두더지를 비유로 들며 다음과 같이 거절의 뜻를 표한다. [그대는 돌아 가시오. 내게 천하란 아무 소용없소. 요리사가 음식을 잘못 만든다고 할지라도 시동이나 신주가 술단지와 고기그릇을 들고 그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오(庖人雖不治庖, 尸祝不越樽俎而代之矣).]
[越俎代庖]란 [자신의 직분을 넘어 타인의 일을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越俎之嫌(월조지혐)]이라는 말로도 쓰이는데, 이는 [자신의 직분을 넘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꺼리다]라는 뜻이다. 일 처리가 썩 훌륭하지 않더라도,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030
亡國之音(망국지음)
亡(망할 망) 國(나라 국) 之(갈 지) 音(소리 음)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에 들었다는 멋있는 음악에 관한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의 평공(平公)에게 산동의 복수(?水)라는 곳에서 들었던 음악을 자랑하였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는데, 그는 이 음악을 듣고 깜짝 놀라 [이건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의 음악입니다(亡國之音).]라고 말하며 연주를 중지시켰다.
사광은 그 음악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것은 주나라의 악사인 연(延)이 주왕(紂王)을 위해 만든 음탕한 음악입니다. 무왕(武王)이 주나라를 정벌하자 연(延)은 복수까지 도망와서는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음악은 복수 강변에서만 들을 수 있으며, 최초로 듣는 자는 반드시 나라를 빼앗긴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亡國之音]은 [亡國之聲(망국지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나라를 망칠 음악]을 말한다. 최근 일부 유행가의 가사에도 음란한 표현이나 욕설 등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주왕의 음악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음악이라면 곧 [亡國之音]이 아닐까.
031
匹夫之勇(필부지용)
匹(필 필) 夫(지아비 부) 之(-의 지) 勇(날쌜 용)
맹자(孟子) 양혜왕하(梁惠王下)편에는 춘추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맹자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는 선왕은 왕도정치를 설명하는 맹자에게 이웃 나라들과 사귀는 방법이 있겠는가를 물었다. 맹자는 인(仁)과 지(智)에 의한 교류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선왕은 맹자의 말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용기를 좋아 한다는 것이요]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맹자는 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왕께서는 작은 용기를 갖지 마십시오. 칼자루을 어루만지며 노려보면서 {네가 감히 나를 당해내겠느냐?}라고 하신다면, 이는 필부의 용기입니다(此匹夫之勇). 그것은 겨우 한 사람만을 대적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제발 큰 용기를 가지십시오.]
[匹夫之勇]이란 [사려분별 없이 혈기만 믿고 날뛰는 소인들의 경솔한 용기]를 말한다. 얼마전 고층빌딩에서 돈을 뿌렸던 한 노동자의 행동을 두고 [匹夫之勇]이니 [호연지기(浩然之氣)]이니 하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匹夫之勇]으로 즉각 반응을 보여야 할 정치인들은 지금껏 침묵하고 있다.
032
蒲柳之姿(포류지자)
蒲(부들 포) 柳(버들 류) 之(-의 지) 姿(맵시 자)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편에는 진(晉)나라 간문제(簡問帝)였던 사마욱(司馬昱)과 유명한 화가인 고개지의 부친이자 후에 상서좌승(尙書左丞)의 관직을 지내게 될 고열(顧悅) 사이의 대화가 실려 있다.
고열은 간문제와 같은 30대의 나이였지만 머리가 먼저 희어졌다. 간문제가 이를 의아하게 여겨 [경은 어찌하여 나보다 먼저 머리가 희어졌는가?]라고 물었다. 고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임금님은 송백(松柏)과 같아서 설상(雪霜)을 겪으면서도 더욱 무성해지지만, 저는 물버들과 같아 가을이 되면 곧 잎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蒲柳之姿, 望秋而落).]
고열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지나치게 공무에만 몰두하여 침식(寢食)을 소흘히 하였던 까닭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蒲柳]란 [물가에서 자라는 버들]을 가리키며 [수양(水楊)] [포양(蒲楊)]이라고도 한다. [蒲柳之姿]는 [蒲柳之質(포류지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蒲柳]의 잎이 일찍 떨어지듯 [일찍 노쇠(老衰)하는 체질] 또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 등을 비유한 말이다. 빈둥거리며 살찌는 사람보다는 아직은 열심히 일하는 고열같은 이들이 많아 정말 다행스럽다.
033
似而非(사이비)
似(같을 사) 而(말 이을 이) 非(아닐 비)
맹자(孟子) 진심장하(盡心章下)편에는 스승 맹자(孟子)와 제자인 만장(萬章)의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만장이 [온 고을이 다 그를 향원(鄕原)이라고 한다면 어디를 가나 향원일 터인데 공자께서 덕(德)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惡似而非者). 강아지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곡식의 싹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망령됨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믿음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 보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 색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세속에 따라 야합라는 위선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셨다].
[似而非]란 [사시이비(似是而非)]에서 나온 말이며, 겉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似而非]는 큰 해악(害惡)이다. 하지만 [似而非]를 가려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해악이다.
034
季札掛劍(계찰괘검)
季(끝 계) 札(패 찰) 掛(걸 괘) 劍(칼 검)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오(吳)나라 왕 수몽(壽夢)의 아들인 계찰(季札)의 일화가 실려 있다.
계찰은 처음 사신으로 떠났을 때 오나라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서(徐)나라의 군주를 알현하게 되었다. 서나라의 군주는 계찰의 보검(寶劍)이 마음에 들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계찰은 속으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지만, 사신의 자격으로 중원(中原)의 각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였기 때문에 검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돌아 오는 길에 서나라에 도착해보니 서나라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이에 계찰은 자신의 보검을 풀어 무덤가의 나무에 걸어놓고 떠났다. 수행원이 그 이유를 묻자 계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이 칼을 그에게 주려고 결심하였는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어찌 나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
훗날 계찰은 자신에게 맡겨진 왕위(王位)마저 사양한다. [季札掛劍(季札이 검을 걸어놓다)]이란 [신의(信義)를 중히 여김]을 비유한 말이다. 대권(大權)주자 가운데에 계찰 같은 이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035
欲速不達(욕속부달)
欲(하고자 할 욕) 速(빠를 속) 不(아닐 불) 達(다다를 달)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는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가 거보(?父)라는 고을의 지방관이 되어 공자를 찾아와서 정치에 관하여 묻는 대목이 실려 있다.
공자는 자하의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을 빨리 하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돌보지 말아라. 빨리 하려고 들면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欲速則不達), 작은 이익을 돌보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欲速]이란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얼른 성과를 올리려는 성급한 마음을 말한 것이며, [欲速不達]이란 서두르면 도리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말에는 [급할수록 천천히]라는 표현이 있고, 영어에는 [Haste makes waste.]나 [More haste, less speed.]라는 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의 조급한 심리를 경계한 표현들이다.
얼마전 고속 전철을 달릴 TGV열차가 차고에서 세월을 보내야 할 것 같다는 보도가 있었다. 총알 같은 TGV를 좀더 일찍 굴려 보려는 성급한 마음에 철길 만드는 일에는 정신을 제대로 쏟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036
朝三暮四(조삼모사)
朝(아침 조) 三(석 삼) 暮(저물 모) 四(넉 사)
열자(列子)의 황제(黃帝)편과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원숭이를 기르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기록한 대목이 있다.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원숭이를 너무 사랑하여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원숭이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원숭이들도 저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원숭이를 사육하다 보니 먹이 대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는 원숭이의 먹이를 제한하고자 하였으나 많은 원숭이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서 먼저 그들을 속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 준다면(若與?朝三而暮四) 족하겠느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자, 저공은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준다면 족하겠느냐?]라고 했다. 이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朝三暮四]란 본시 눈 앞의 차이만을 알뿐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나,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이고 농락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037
民以食爲天(민이식위천)
民(백성 민) 以(써 이) 食(밥 식) 爲(할 위) 天(하늘 천)
사기(史記) 역생 육가열전(?生 陸賈列傳)에는 한(漢)나라의 역이기(?食其)라는 모사(謀士)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진(秦)나라가 멸망한 후,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는 천하를 다투고 있었다. 항우는 우세한 병력으로 유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유방은 성고의 동쪽 지역을 항우에게 내주고자 하였다.
이때 유방의 모사였던 역이기는 식량 창고인 오창(敖倉)이 있는 그 지역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말했다. [저는 {천(天)이 천(天)이라는 것을 잘 아는 자는 왕업을 이룰 수 있으나, 천을 천으로 알지 못하는 자는 왕업을 이룰 수 없다. 왕자(王者)는 백성을 천(天)으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천(天)으로 안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방은 역이기의 말에 따라, 곧 전략을 바꾸었다.
[民以食爲天]이라는 말은 한서(漢書) 역이기전(?食其傳)에도 실여 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것]임을 뜻한다. 임금된 자는 백성을 하늘 섬기듯 섬겨야 하고, 백성들의 하늘은 임금이 아니라 곧 식량임을 알아야 한다.
038
駑馬十駕(노마십가)
駑(둔할 노) 馬(말 마) 十(열 십) 駕(멍에 가)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는 [무릇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지만, 둔한 말일지라도 열흘 동안 달려 간다면 이를 따를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라는 말이 있다. 또한 [반 걸음이라도 쉬지 않으면 절룩거리며 가는 자라도 천리를 갈 수 있고, 흙을 쌓는데도 멈추지 않고 쌓아나가면 언덕이나 산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駑馬]란 걸음이 느린 말을 가리키며, 재능이 없고 무능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한다. 말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하루 동안의 노정(路程)을 [一駕]라 하니, [十駕]란 곧 열흘간의 노정을 말한다.
[駑馬十駕]란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수레를 끌고 다니다]라는 뜻이다.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영어의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라는 표현과 비슷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 학습자의 능력에 따른 수준별 지도가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일부 과목에서 다소 부진한 학생일지라도 [駑馬十駕]하듯 노력한다면 상당히 향상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039
與虎謀皮(여호모피)
與(더불 여) 虎(범 호) 謀(꾀할 모) 皮(가죽 피)
태평어람(太平御覽) 권208에는 마치 이솝 우화(寓話)와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周)나라 때, 어떤 사나이가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는 따뜻한 가죽 이불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여우 가죽으로 이불을 만들면 가볍고 따뜻하다는 말을 듣고, 곧장 들판으로 나가 여우들과 이 가죽 문제를 상의하였다(與狐謀其皮). 자신들의 가죽을 빌려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여우들은 깜짝 놀라서 모두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얼마 후, 그는 맛좋은 제물(祭物)을 만들어 귀신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에 그는 곧 양들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하며, 그들에게 고기를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양들은 모두 숲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與狐謀皮]라는 말은 후에 [與虎謀皮]로 바뀌었으며, [與虎謀皮]는 [호랑이에게 가죽을 요구하다]라는 뜻이다. 여우나 호랑이에게 가죽을 벗어 내라하고, 양에게 고기를 썰어 내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與虎謀皮]란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040
四知(사지)
四(넉 사) 知(알 지)
십팔사략(十八史略)의 양진전(楊震傳)에는 후한(後漢) 때의 관리인 양진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평소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儒學)에 정통했던 양진은 한 고을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군의 하급 관청인 현(縣)의 현령(縣令)이 몰래 많은 금품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양진에게 건네 주려고 하며 [지금은 밤이 깊으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양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알고 있는데(天知地知子知我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현령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대로 물러갔다. 훗날 양진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환관과 황제의 유모인 왕성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모함을 받게 되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四知]란 [天知地知子知我知]를 가리키는 말이며, [세상에는 비밀이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四知]와 비슷한 서양식 표현으로는 영어의 [Walls have ears.]라는 속담을 들 수 있다.
041
含沙射影(함사사영)
含(머금을 함) 沙(모래 사) 射(활 쏠 사) 影(그림자 영)
동한(東漢)시대 서기 100년경에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훼부(盤部)에는 전설 중의 괴물을 뜻하는 [역( 盤或
)]이라는 글자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해설에 따르면, [역]이라는 괴물은 자라의 모습인데 다리는 셋 뿐이고, 입김을 쏘아 사람을 해친다고 한다.
청대(淸代)의 왕균(王筠)이라는 학자는 이 [ 盤或
]자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일명 사공(射工), 사영(射影), 축영(祝影)이라 한다. 등은 딱딱한 껍질로 되어 있고 머리에는 뿔이 있다. 날개가 있어 날 수 있다. 눈은 없으나 귀는 매우 밝다. 입안에는 활과 같은 것이 가로로 걸쳐 있는데,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숨기운을 화살처럼 뿜는다. 물이나 모래를 머금어 사람에게 쏘는데(含沙射人), 이것을 맞으면 곧 종기가 나게 되며(中卽發瘡), 그림자에 맞은 사람도 병이 나게 된다(中影者亦病).]
[含沙射影(모래를 머금어 그림자를 쏘다)]이란 [암암리에 사람을 해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는 떳떳치 못한 수단으로 남을 해치는 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042
兵不厭詐(병불염사)
兵(군사 병) 不(아닐 불) 厭(싫을 염) 詐(속일 사)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에는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초(楚)나라와 전쟁을 하고자 구범(舅犯)에게 견해를 묻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는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이 일을 성취하려면 어찌해야 되겠는가?]라는 진 문공의 물음에 구범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가 듣건대, 번다한 예의를 지키는 군자는 충성과 신의를 꺼리지 않지만, 전쟁에 임해서는 속임수를 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戰陣之間, 不厭詐僞). 그러니 적을 속이는 술책을 써야 할 것입니다.]
진 문공은 구범의 계책에 따라, 초나라의 가장 약한 우익(右翼)을 선택하였다.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신속하게 그곳을 공격함과 동시에 주력부대는 후퇴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초나라 군대의 좌익(左翼)을 유인해냈다. 진 문공은 곧 좌우에서 협공하여 초나라 군대를 쳐부술 수 있었다.
조조(曹操)도 삼국연의(三國演義) 23회에서 [兵不厭詐]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兵不厭詐]는 [군불염사(軍不厭詐)]라고도 하는데, 이는 [전쟁에서는 모든 방법으로 적군을 속여야 함]을 말한다. 대전(大戰)과 대선(大選)에는 [兵不厭詐]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043
掩耳盜鈴(엄이도령)
掩(가릴 엄) 耳(귀 이) 盜(훔칠 도) 鈴(방울 령)
여씨춘추(呂氏春秋) 자지(自知)편에는 귀를 막고 종을 훔치던 한 사나이의 비유가 실려 있다.
춘추시대 말엽, 진(晉)나라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귀족들의 격렬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대표적인 신흥 세력이었던 조간자(趙簡子)가 구세력의 핵심인 범길사(范吉射)의 가족을 멸하였는데, 그의 가족중 살아 남은 자들은 모두 진나라를 탈출하였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이미 몰락해 버린 범길사의 집에 들어와서는 대문에 걸려있는 큰 종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종을 훔쳐가려고 생각했으나 혼자 옮기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종을 조각내어 가져가려고 망치로 종을 내리친 순간, [꽝]하는 큰 소리가 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들을까 무서워 얼른 자기의 귀를 틀어 막았다. 그는 자기의 귀를 막으면 자기에게도 안들리고 다른 사람들도 듣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掩耳盜鈴(귀 막고 방울 도둑질 하기)]은 [掩耳偸鈴(엄이투령)] [掩耳盜鐘(엄이도종)]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어리석은 자가 자신의 양심을 속임]을 비유한 말이다.
044
望梅解渴(망매해갈)
望(바랄 망) 梅(매화나무 매) 解(풀 해) 渴(목마를 갈)
세설신어(世說新語) 가휼(假譎)편에는 조조(曹操)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일화가 실려 있다.
동한(東漢) 말엽에, 조조는 군대를 통솔하여 장수(張繡)를 정벌하러 나섰다. 행군 도중 날씨가 너무 더워 병사들은 지치고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해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한참 생각하다가 묘책이 떠올랐는지 병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금나 더 가면 앞에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前有大梅林). 열매도 많이 달려 있는데, 그 맛은 달고도 새콤하다. 이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可以解渴).]
병사들은 매화가 있다는 말에 입안에 곧 침이 돌았다.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전진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望梅解渴(매실을 생각하며 갈증을 풀다)]은 [望梅止渴(망매지갈)] [梅林解渴(매림해갈)]이라고도 한다. 이는 [공상으로 잠시 동안의 평안과 위안을 얻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제 매실(梅實) 같은 [개혁]이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045
各自爲政(각자위정)
各(각각 각) 自(스스로 자) 爲(할 위) 政(정사 정)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2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춘추시대, 송(宋)나라와 정(鄭)나라가 전투를 하게 되었다. 송나라의 대장인 화원(華元)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특별히 양고기를 지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마부인 양짐(羊斟)이라는 사람에게만 주지 않았다. 양짐은 이 일로 화원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다음 날 접전이 시작되자, 화원은 마차 위에서 양짐에게 마차를 오른쪽으로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양짐은 반대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는 거냐?]라는 화원의 호령에 양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제의 양고기는 당신의 뜻이고, 오늘의 이 일은 나의 생각이오(疇昔之羊子爲政, 今日之事我爲政).]
결국 화원은 곧 정나라 군사들에게 생포되었고, 대장이 없어진 송나라 군대는 정나라에게 크게 패하였다.
[各自爲政]이란 [각자가 자기의 주장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며, 동시에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의 조화와 협력을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046
門前雀羅(문전작라)
門(문 문) 前(앞 전) 雀(참새 작) 羅(새그물 라)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는 한(漢)나라 때의 현신(賢臣)인 급암(汲?)과 정당시(鄭當時)의 일화가 실려 있는데, 사마천(司馬遷)은 이 편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두었다.
[급암이나 정당시 같은 어진 이들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賓客)이 10배로 늘어나고, 세력이 없어 지면 빈객들은 흩어져 같다. 그러니 보통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규(下?) 사람 적공(翟公)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 적공이 처음 정위(廷尉)라는 관직에 오르자 빈객들이 그의 집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찾아 오는 빈객들이 없어 대문에다 참새 잡는 그물을 쳐도 될 지경이 되었다(門外可設雀羅). 후에 적공이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되자 빈객들이 또다시 밀려 들었다.]
[門前雀羅]란 [문 앞의 참새 그물]이라는 뜻으로 [門可雀羅(문가작라)]라고도 한다. 이는 [문밖에 새그물을 쳐도 될 만큼 찾아 오던 이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부(富)와 권세(權勢)를 누리며 [문전성시(門前成市)]를 바라보다가 몰락한 두 전직 대통령에게는 훨씬 더 큰 참새 그물이 필요할 것이다.
047
壽則多辱(수즉다욕)
壽(목숨 수) 則(곧 즉) 多(많을 다) 辱(욕되게 할 욕)
장자(莊子) 천지(天地)편에는 요(堯) 임금이 화(華)라는 고장을 여행했을 때의 일이 실려 있다.
요 임금이 화(華)라는 고장에 이르자 그곳의 관원이 다음가 같이 말했다. [아, 성인(聖人)이시군요. 성인께서 장수하시도록 축복해주소서.] 이에 요 임금은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그 관원이 [부자가 되시도록 해주소서.]라고 말하자, 요임금은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관원은 다시 [많은 아들을 두소서.]라고 말했다. 요임금은 이 말에도 [그것도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원이 사양하는 이유를 묻자, 요임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들이 많아지면 걱정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 귀찮은 일이 많으며, 장수하면 욕된 일이 많아집니다(壽則多辱). 이 세가지는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저는 사양하는 것입니다.]
[壽則多辱]이란 나이 먹고 오래 살면 그만큼 좋지 않은 일도 많이 겪게 된다는 말이다. 얼마전 치매 노인을 택시 회사에 방치한 일이 보도되었다. 곱게 늙는 것은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다.
048
歸馬放牛(귀마방우)
歸(돌려 보낼 귀) 馬(말 마) 放(놓을 방) 牛(소 우)
상서(尙書) 무성(武成)편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의 주임금을 쳐부수고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아침에 주(周)나라로부터 출발하여 상(商)나라를 치러 갔었다. 그 네쨋달 초사흗날 왕은 상나라로부터 와서 풍(豊)에 이르러 무력(武力)을 거두고 문교(文敎)를 닦아, 말은 화산의 남쪽 기슭으로 돌려 보내고 소는 도림의 들에 풀어놓아(歸馬于華山之陽, 放牛于桃林之野), 천하에 다시 쓰지 않을 것을 보이었다.]
[歸馬]는 군용(軍用)으로 쓰던 말을 산으로 돌려보내어 놓아 주었음을 뜻한다. [歸馬放牛]란 곧 전쟁에 사용할 말과 소를 숲이나 들로 돌려 보내어 다시 쟁기나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이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음]을 말한다.
어떤 학자는 남북이 통일되면, 남북한 군사력의 70%정도가 감소되리라고 하였다. 그때가 되면 정말 탱크와 장갑차는 논밭을 갈고, 군함은 원양 어업에 닻을 올리며, 전투기는 총알 택시처럼 한라에서 백두까지 날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049
紙上兵談(지상병담)
紙(종이 지) 上(위 상) 兵(군사 병) 談(말씀 담)
사기(史記) 염파 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는 허울좋은 한 장군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에 조사(趙奢)와 염파(廉頗)라는 명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진(秦)나라의 침공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대장이었던 백기(白起)는 염파의 지략(智略)을 당해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조나라에 거짓 정보를 흘렸다. 조나라 왕은 결국 염파를 대신하여 조사의 아들인 조괄(趙括)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병법을 공부하였지만 실전(實戰)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장군의 직에 임용되지 않기를 원하였으나 조나라 왕은 끝내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전투에 내보냈다.
진나라 장군 백기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괄은 진나라 군사의 화살에 죽고 수십만의 조나라 군사들은 항복했다가 모두 생매장 당하였다.
[紙上兵談(Mere paper talk)]이란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공론(空論)]을 비유한 말이며, [탁상공론(卓上空論:an armchair argument)]이라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050
肝膽楚越(간담초월)
肝(간 간) 膽(쓸개 담) 楚(나라이름 초) 越(나라이름 월)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는 [중니가 말하길 뜻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 같으며(肝膽楚越也), 뜻이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물도 모두 하나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또한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유협(劉?)이 지은 문심조룡(文心雕龍) 비흥(比興)편에는 [물체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합치고 보면 간과 쓸개처럼 가까운 사이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간담(肝膽)]이란 본시 관계가 매우 가까운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숙진편(林眞篇)에서는 [肝膽胡越(간담호월)]이라 하였는데, [肝膽楚越]과 같은 표현이다. 이는 [간과 쓸개의 거리가 초나라와 월나라의 관계처럼 멀다]라는 뜻이며, [비록 거리상으로는 서로 가까이 있지만 마치 매우 멀리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도 입장에 따라서는 멀어 질 수도 있고, 또 서로 다른 관계가 있는 것일지라도 형편에 따라서는 가까워질 수 있다. 후보 경선에 나서고 있는 크고 작은 용(龍)들은 서로 [肝膽]처럼 가깝기도 하고 [楚越]처럼 멀기도 하다.
051
巧言令色(교언영색)
巧(공교할 교) 言(말씀 언) 令(착할 령) 色(빛 색)
상서(尙書) 경명(?命)편에는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백경(伯?)을 태복(太僕)으로 임명하며 훈계하였던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대의 아래 사람들을 신중히 고르되, 교묘한 말을 하는 자, 좋은 듯 꾸민 얼굴을 하는 자, 남의 눈치만 보는 자, 아첨하는 자는 쓰지 말고, 오직 올바른 사람만을 쓰도록 하시오(無以巧言令色便抗側媚, 其惟吉士).]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는 [교묘한 말과 꾸민 얼굴에는 인이 적다(巧言令色鮮矣仁(교언영색선의인).]이라는 말이 있으며, 공야장(公冶長)편, 양화(陽貨)편 등에도 [巧言令色]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巧言(fine words)]은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묘하게 꾸민 말]을 뜻하며 [令色(an insinuating appearance)]이란 [보기 좋게 꾸민 거짓된 표정]을 뜻한다.
TV 토론회에 출연한 대선주자들은 예상 문제(?) 풀이와 답변 연습, 그리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얼굴 가꾸기에 적지않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이 기대했던 것은 그들의 말재주와 멋있는 표정이 아니었으리라.
052
開卷有益(개권유익)
開(열 개) 卷(책 권) 有(있을 유) 益(더할 익)
승수연담록(慷水燕談錄)은 송(宋)나라 왕벽지(王闢之)가 남송(南宋) 고종(高宗) 이전의 잡다한 일화들을 모아 엮은 책인데, 이 책의 권6에는 독서를 무척 좋아했던 송나라 태종(太宗)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태종은 이방(李昉) 등 14명의 학자들에게 사서(辭書)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이들은 이전에 발간된 많은 책들을 널리 인용하는 등 7년 동안의 작업을 통하여 사서를 완성하였다. 55개부문으로 일천권에 달하는 방대한 이 책은 처음 서명을 태평편류(太平編類)라 하였으나 후에는 태평어람(太平御覽)으로 개칭하였다.
태종은 이 사서가 완성되자 몹시 기뻐하며 매일 이 책을 읽었다. 스스로 하루에 세 권씩 읽도록 정하여 놓고, 정사(政事)로 인해 못 읽는 경우에는 쉬는 날 이를 보충하였다.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태종은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책을 펼치면 이로움이 있으니, 짐은 이를 피로하다 여기지 않소(開卷有益, 朕不以爲勞也).]
[開卷有益(Reading gives advantages)]이란 [책을 읽으면 이로움이 있음]을 말한다. 요즘 책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모두들 황제(皇帝)보다 더 바빠진 탓일까?
053
涸轍鮒魚(학철부어)
涸(물 마를 학) 轍(바퀴자국 철) 鮒(붕어 부) 魚(물고기 어)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실려있다.
집이 가난한 장주(莊周:장자의 이름)는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고을의 세금을 거둬들여 그때 삼백금을 빌려주겠다는 감하후의 말에 장주는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지며 말을 했다.
[내가 이리로 오는데 도중에 부르는 소리가 있어 뒤를 돌아보니 수레 바퀴 자국에 붕어가 있있소(車轍中有鮒魚焉). 그 붕어는 약간의 물만 있어도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했소. 그래서 나는 남쪽의 오월(吳越)의 왕에게로 가서 촉강(蜀江)의 물을 보내주겠다고 했지요. 그러자 그 붕어는 불끈 성을 내며 차라리 건어물전에 가서 자기를 찾으라고 하더군요.]
[涸轍鮒魚(a fish in a dry rut-in extremities)]는 학철지부(涸轍之鮒), 철부지급(轍鮒之急), 고어학철(枯魚涸轍), 학부(涸鮒) 등이라고도 하며, [극도의 곤경에 처하여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북한 인구의 4분의 1인 550만명이 기아선상에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역시 [허울 좋은 주체 낙원 건설]이 아니라 [한 그릇의 강냉이 죽]이다.
054
金迷紙醉(금미지취)
金(쇠 금) 迷(미혹할 미) 紙(종이 지) 醉(취할 취)
송(宋)나라의 도곡(陶谷)이 편찬한 청이록(淸異錄)이라는 책에는 당나라 말엽의 명의(名醫)인 맹부(孟斧)의 고사가 실려있다.
그는 독창(毒瘡) 치료에 뛰어나서, 자주 황궁에 들어가 소종(昭宗) 황제의 병을 진료하였다. 차츰 황제를 진료하는 시간과 횟수가 많아지자, 그는 황궁내의 실내 장식이나 기물의 배치 등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훗날 맹부는 사천(四川)지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황궁을 모방하여 자신의 거처를 장식하였는데, 방안의 기물들을 모두 금종이로 포장하였다. 창문을 통하여 햇빛이 비칠 때면, 방안은 온통 금빛으로 가득하여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다 돌아가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방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만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되고 취해 버렸다네(此室暫憩, 令人金迷紙醉).]
[金迷紙醉]는 [紙醉金迷]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극히 사치스런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일부 초대형 호화 빌라의 실내장식에도 금빛나는 외제품들만 사용된다고 하는데, 입주자들의 건강(?)이 걱정스럽다.
055
徒勞無功(도로무공)
徒(헛될 도) 勞(힘쓸 로) 無(없을 무) 功(공 공)
장자(莊子) 천운(天運)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공자가 서쪽의 위(衛)나라로 유세(遊說)를 떠났다. 스승인 공자의 여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안연(顔淵)에게 사금(師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물길을 가는 데에는 배가 가장 좋으며, 육지를 가는 데에는 수레가 최고이지. 그런데 만약 배를 육지에서 밀고 간다면 평생 걸려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네. 옛날과 지금의 차이는 물과 육지의 차이와 같으며, 주나라와 노나라의 차이도 이러한데, 공자께서 주나라에서 시행되었던 것을 노나라에서 시행하려는 것은 배를 육지에서 미는 것과 같아 애만 쓰고 보람은 없으며(是猶推舟于陸也, 勞而無功), 틀림없이 몸에 재앙이 있을 걸세].
[徒勞無功(Toil in vain)]은 [도로무익(徒勞無益)]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이나 이익이 없음]을 뜻한다.
얼마전 국가대표 청소년 축구팀이 국민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에게 10대3으로 패하였다. 어린 선수들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버린 것 같아 무척 안타깝다.
056
朝薺暮鹽(조제모염)
朝(아침 조) 薺(냉이 제) 暮(저물 모) 鹽(소금 염)
당(唐)나라 한유(漢愈)의 문장 가운데 송궁문(送窮文)이라는 글이 있다. 한유는 이 글에서 자신에게 어려움을 주는 다섯 가지의 일들을 귀신으로 묘사하고, 이것들을 쫓아버리려는 자신의 마음를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유는 이 글에서 의인화된 궁귀(窮鬼)에게 세 번 읍하고 자신으로부터 떠나줄 것을 간청하였다.
가난 귀신이라는 [궁귀]는 한참 있다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와 선생님이 함께 살아온지 사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렸을 적에 저는 선생님을 어리석게 여기지 않았으며, 선생님께서 남쪽으로 귀양갔을 때, 저는 그 고장에 익숙하지 못하여 여러 귀신들이 속이고 능멸하였습니다. 태학에서 4년간 공부하는 동안 아침에는 냉이나물을 먹고 저녁에는 소금으로 반찬하며(大學四年 朝薺暮鹽), 오직 저만이 선생님을 보살펴 주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었습니다.]
[朝薺暮鹽]이란 냉이와 소금만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몹시 빈곤한 생활을 의미하며, 몇주전 KBS [일요스페셜]에 나타난 북한 주민들의 궁핍한 생활을 묘사하는데 딱 들어맞는 표현이기도 하다.
057
人面獸心(인면수심)
人(사람 인) 面(낯 면) 獸(짐승 수) 心(마음 심)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는 한대(漢代) 흉노들의 활동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흉노족은 서한(西漢) 시대 중국의 북방에 살았던 유목 민족이었다. 당시 한(漢)나라는 흉노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풍부하였으므로, 흉노족들은 자주 한나라를 침입하였다. 흉노족의 수십만 기마병(騎馬兵)은 해마다 한나라의 북방 국경을 넘어 들어와 농가를 기습하여 가축을 약탈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납치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133년, 한 무제(武帝)는 흉노 정벌에 나서 수년 동안의 전투를 겪으며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었다.
동한(東漢) 시대의 역사가인 반고(班固)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흉노족의 잔악함을 묘사하여 [오랑캐들은 매우 탐욕스럽게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데, 그들의 얼굴은 비록 사람같으나 성질은 흉악하여 마치 짐승같다(人面獸心)]라고 기록하였다.
[人面獸心(man in face but brute in mind)]이란 본시 한족(漢族)들이 [흉노]를 멸시하여 쓰던 말이었으나, 후에는 성질이 잔인하고 흉악한 짐승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058
得意洋洋(득의양양)
得(얻을 득) 意(뜻 의) 洋(넘칠 양) 洋(넘칠 양)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는 겸손의 교훈을 주는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안영(晏?)에게는 한 마부(馬夫)가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이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하려는데, 마부의 처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의 거동을 엿보았다. 자신의 남편은 수레 위에 큰 차양을 씌우더니, 마차의 앞자리에 앉아 채찍질하는 흉내를 내며 의기양양하여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意氣揚揚, 甚自得也).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그의 처는 그에게 이혼해야겠다고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마부가 그 이유를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자(晏子)께서는 키가 6척도 못되지만 나라의 재상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매우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8척이 넘으면서도 남의 마부가 된게 만족스런 듯 기뻐하니, 저는 이런 남자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후 마부는 늘 겸손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안자는 그를 대부(大夫)로 천거하였다.
[得意洋洋(triumphant)]은 [의기양양(意氣揚揚)]이라고도 한다. 당선될 것처럼 득의양양 떠들어대는 대선주자들에게서 마부의 모습을 보게 된다.
059
殷鑒不遠(은감불원)
殷(성할 은) 鑒(거울 감) 不(아닐 불) 遠(멀 원)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의 탕(蕩)이라는 시는 나라의 흥망(興亡)에 대한 교훈을 노래한 것이다. 하(夏)나라 최후의 왕인 걸왕(桀王)은 잔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핍박하다 결국 그들의 반항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16세기경 상(商)부락의 지도자인 탕(湯)는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4세기경에는, 상나라의 왕 반경(盤庚)은 수도를 은(殷)지역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11세기 중엽 당시 서백후(西伯侯)의 아들인 발(發)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은나라가 멸망하기 전, 서백후는 주왕에게 간언하기를 [넘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가지와 잎은 해가 없어도 뿌리는 실상 먼저 끊어진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라 걸왕 때에 있다(殷鑒不遠 在夏後之世)]라고 하였다. [鑒]은 [선례(先例)] [본보기]라는 의미로 쓰였으니, [殷鑒不遠(An example is not far to seek)]이란 [본보기로 삼을 만한 남의 실패가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뜻한다.
060
一擧兩得(일거양득)
一(한 일) 擧(들 거) 兩(두 량) 得(얻을 득)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나오는 고사이다.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의 혜왕은 초(楚)나라의 사신 진진(陳軫)에게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를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 물었다. 진진은 다음과 같은 고사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변장자(卞莊子)가 범을 찌르려고 하자 여관의 아이가 만류하면서 {지금 두 범이 서로 소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는데, 먹어 보고 맛이 있으면 서로 빼앗으려고 싸울 것입니다. 싸우게 되면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죽을 것이니, 그 때 다친 놈을 찔러 죽이면 일거에 두마리의 범을 잡았다는 이름을 얻게될 것입니다(一擧必有雙虎之名)}라고 말했답니다. 조금 후에 두 범이 싸워서 큰 놈이 다치고 작은 놈이 죽자, 변장자가 다친 놈을 찔러 죽이니 과연 한 번에 두 마리 범을 잡은 공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一擧果有雙虎之功).]
[一擧兩得]은 [一石二鳥(Killing two birds with one stone)] [一箭雙?(일전쌍조: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와 같은 표현이며, 모두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뜻한다.
061
時不可失(시불가실)
時(때 시) 不(아닐 불) 可(옳을 가) 失(잃을 실)
상서(尙書) 태서(泰誓)편은 주(周)나라 서백후의 아들인 발(發)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함에 임하여 군사들을 모아 놓고 훈시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소인은 새벽부터 밤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돌아가신 아버지 문왕의 명을 받았으니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큰 땅에도 제사를 지냈으며, 그대 무리들을 거느리고 하늘의 벌하심을 이루려는 것이오. 하늘은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니, 백성들이 바라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그대로 따르시오. 그대들은 바라건대 나 한 사람을 도와 영원히 온 세상을 맑게 하시오(爾尙弼予一人, 永淸四海). 때가 되었으니 잃어서는 아니 되오(時哉弗可失)!] 기원전 222년, 서백후 문왕(文王)의 아들인 발(發)은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중국 땅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주나라 무왕(武王)인 것이다.
[時不可失(Must not lose the opportunity)]이란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뜻이며, [물실호기(勿失好機)]와 비슷한 표현이다. 역사적으로 부(富)와 명예는 보통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기회를 놓치지 않은 몇몇 사람들의 몫이었다.
062
空城計(공성계)
空(빌 공) 城(성 성) 計(꾀 계)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텅빈 성(城)에 속아 넘어간 조조(曹操) 휘하의 한 장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갈량은 양평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두고, 대장군 위연(魏延) 등을 파견하여 조조의 군대를 공격케 하였다. 때문에 성 안에는 병들고 약한 소수의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이 때, 조조의 군대가 대도독 사마의(司馬懿)의 통솔로 양평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성을 지키고 있던 유비의 군사들은 이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과감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군사들을 시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입구와 길을 청소하여 사마의를 영접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자신은 누대(樓臺)에 올라가 조용히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사마의는 군사를 이끌고 성 앞에 당도하여 이러한 상황을 보고 의심이 들었다. 그는 성 안에 이미 복병이 두고 자신을 유인하려는 제갈량의 속임수라고 생각하고, 곧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空城計]란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지만 사실은 준비가 전혀 없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피서철 빈집털이가 우려된다고 하는데, 제갈량의 계략을 응용해 봄직하다.
063
明鏡高懸(명경고현)
明(밝을 명) 鏡(거울 경) 高(높을 고) 懸(매달 현)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나라의 함양(咸陽)궁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들 가운데, 너비가 4척, 높이가 5척 9촌으로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臟)이 나타났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환부가 나타났으며, 이 거울은 사람의 나쁜 마음까지도 비춰 보였다. 이 때문에 진시황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보았다.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 유방(劉邦)이 함양을 공격하던 혼란속에서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明鏡高懸(a clear mirror hung on high)]은 [진경고현(秦鏡高懸)]이라고도 하며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이라는 뜻이다. 이는 [시비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한 법관]을 비유한다. 일전에 한 법관이 판결한 술자리의 한 턱(?) 값에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는 것 같다.
064
弱肉强食(약육강식)
弱(약할 약) 肉(고기 육) 强(굳셀 강) 食(밥 식)
한유(韓愈)의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는 한유가 문창이라는 승려에게 써 보낸 글로서, 한유의 불교에 대한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한유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道)에 있어서 인(仁)과 의(義)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약과 형정(刑政)보다 더 바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천하에 시행하면 만물이 모두 합당함을 얻게 되고, 그것들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면 몸은 편안하고 기운은 평온하게 되는 것입니다. ?? 지금의 불교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누가 전한 것입니까? 새들이 몸을 숙여 모이를 쪼다가 몸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짐승들이 깊은 곳에 있으면서 드물게 나타나는 것은 다른 것들이 자신을 해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약한 자의 고기를 강한 자가 먹고 있는 것입니다(猶且不脫焉, 弱之肉, 强之食).]
[弱肉强食(The weak become the victim of the strong)]이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 먹힌다]는 뜻이다. 경쟁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요즘 사회에서도 이 말은 전투수칙(?)이나 생존법칙(?)처럼 쓰이고 있다.
065
不可救藥(불가구약)
不(아닐 불) 可(옳을 가) 救(건질 구) 藥(약 약)
시경(詩經) 대아(大雅)에는 한 충신의 답답한 마음을 노래한 [판(板)]이라는 시(詩)가 실려 있다.
서주(西周) 말엽, 여왕(?王)은 포학하고 잔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핍박하였다. 백성들은 몰래 그를 저주하였으며, 일부 대신(大臣)들까지도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여왕은 백성들이 자신을 욕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유명한 관리였던 범백(凡伯)은 왕의 이러한 처사를 지나치다고 여겨 과감하게 글을 올렸으나,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하늘이 저리도 가혹한데 날 그렇게 놀리지 마소. 늙은이는 진정으로 대하는데 젊은이는 교만스럽네. 내 하는 말 망녕된 것 아닌데도 그대들은 농으로 받네. 심해지면 그땐 고칠 약도 쓸 수 없다오(不可救藥).]
기원전 841년, 백성들의 폭동으로 여왕의 폭정은 결국 종말을 맞게 되었다. [不可救藥]이란 [일이 만회할 수 없을 지경에 달하였음]을 형용한 말이다. 학원 폭력의 심각한 상황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모두가 좋은 약을 찾아야 할 때이다.
066
知難而退(지난이퇴)
知(알 지) 難(어려울 난) 而(말 이을 이) 退(물러날 퇴)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12년조에는 [사정이 좋음을 보고 진격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난다는 것은 용병의 바른 원칙이다(見可而進, 知難而退, 軍之善政也)]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정(鄭)나라는 패권(覇權)을 다투던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는데, 정나라는 먼저 진나라에 의지하였다. 그러자 초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자국(自國)의 안전을 위하여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먼데 있는 물로는 불을 끌 수 없듯 진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정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의 군대를 통솔하던 환자(桓子)는 정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겼으며,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진나라로서도 승산이 없었다. 이에 그는 철군하려 하였으나, 지휘에 따르지 않던 부하들은 초나라 군사와 교전을 하여 크게 패하고 말았다.
[知難而退]란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마땅히 물러서야 함]을 뜻한다. 대권을 향한 용(龍)들이 아직껏 꿈틀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대세의 불리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얄팍한 자존심과 환상(?) 때문일 것이다.
067
物腐蟲生(물부충생)
物(만물 물) 腐(썩을 부) 蟲(벌레 충) 生(날 생)
진(秦)나라 말년, 범증(范增)은 항량(項梁)에게 투항하여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다. 항량이 죽은 후, 그의 조카 항우가 그를 계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모(智謀)가 없었으므로 주로 범증의 계획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범증은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유방(劉邦)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곧 유방은 범증과 항우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항우는 이 계략에 휘말려 범증을 의심하여 그를 멀리 하였다. 범증도 몹시 분개하여 항우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후 범증은 병사하였고, 항우는 유방에게 망하였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범증론(范增論)]이라는 글에서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物必先腐也, 而後蟲生之),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物腐蟲生(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이란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불건전한 사회와 부패한 정치는 곧 범죄와 비리(非理)의 무대인 것이다.
068
조장(助長)
助(도울 조) 長(길 장)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편에는 공손추와 맹자의 문답이 실려 있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고 나서, 순리(順理)와 의기(義氣)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송(宋)나라의 한 농부의 조급한 행동을 예로 들었다. 그 농부는 싹이 빨리 자라지 않자 그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나는 오늘 싹이 빨리 자라도록 도와주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들이 궁금하게 여겨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싹들은 자라기는커녕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
맹자는 이 이야기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천하에 싹이 자라도록 돕지 않은 사람을 드물다(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여 내버려두는 사람은 김을 매지 않는 자이고, 자라도록 돕는 사람(助之長者)은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이니, 이는 무익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助長]이란 문자적으로 [도와서 성장시키다]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버려 두어도 잘 될 일을 [쓸데없이 건드려 망쳐버린다]는 부정적 의미가 훨씬 강하다.
069
南郭濫吹(남곽남취)
南(남녘 남) 郭(성곽 곽) 濫(함부로 람) 吹(불 취)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상편에는 남곽처사(南郭處士)라는 무능한 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피리 우)]라는 관악기의 연주를 매우 즐겨 들었다. 그는 많은 악사들이 함께 연주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여, 매번 300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악기를 연주하게 하였다.
우를 전혀 불지 못하는 남곽이라는 한 처사가 선왕을 위하여 우를 불겠다고 간청하였다. 선왕은 흔쾌히 그를 받아들여 합주단의 일원으로 삼고, 많은 상을 하사하였다. 남곽은 다른 합주단원들의 틈에 끼여 열심히 연주하는 시늉을 했다. 몇 해가 지나,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민왕(緡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민왕은 아버지인 선왕과는 달리 300명의 합주단이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듣지 않고 단원 한 사람이 단독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들었다. 난처해진 남곽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 오자 도망치고 말았다.
[南郭濫吹(남곽이 우를 함부로 불다)]는 [남우충수(濫?充數)]라고도 한다. 이는 무능한 자가 재능이 있는 척하거나, 실력이 없는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070
利用厚生(이용후생)
利(이로울 리) 用(쓸 용) 厚(투터울 후) 生(날 생)
상서(尙書) 우서(虞書)의 대우모(大禹謨)에는 우(禹)와 순(舜)임금과 익(益) 세 사람의 정치에 관한 대담이 기록되어 있다.
우는 순임금에게 말하길 [임금이시여, 잘 생각하십시오. 덕으로만 옳은 정치를 할 수 있고, 정치는 백성을 보양(保養)하는데 있으니, 물․불․쇠․나무․흙 및 곡식들을 잘 다스리시고, 또 덕을 바로 잡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삶을 두터이 함을 잘 조화시키십시오(正德利用厚生, 惟和)]하고 하였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 문공(文公) 7년조에도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의 여섯가지가 나오는 것을 육부(六府)라 하고, 백성의 덕을 바르게 하는 정덕(正德)과, 백성들이 쓰고 하는데 편리하게 하는 이용(利用)과, 백성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후생(厚生), 이것을 삼사라 이릅니다(正德利用厚生, 謂之三事)]라는 대목이 보인다.
[利用厚生]이란 [모든 물질들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다]라는 뜻이며, 정치의 핵심을 집약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판에는 [利用厚生]은 커녕 국민들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삶과 지위를 풍족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071
玩火自焚(완화자분)
玩(가지고 놀 완) 火(불 화) 自(스스로 자) 焚(불사를 분)
춘추좌전 은공(隱公) 4년조에는 무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위(衛)나라 군주인 장공(莊公)의 첩이 아들을 낳자 이름을 주우(州沓)라고 하였다. 주우는 어려서부터 장공의 총애를 받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 무력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장공이 죽자 환공(桓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주우는 기원전 719년 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주우는 왕위를 찬탈한 후, 송(宋), 진(陳), 채(蔡) 나라 등과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노(魯)나라에 알려지자 노나라의 은공은 중중(衆仲)이라는 대부에게 주주의 장래가 어떠할 것인지를 물었다.
중중은 대답하길 [주우는 무력만을 믿고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태연합니다만, 무력에 의지했다간 국민을 잃게 됩니다. 무력이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이 그 불속에서 타게 될 것입니다(夫兵, 猶火也. 弗?, 將自焚也)]라고 하였다.
[玩火自焚]이란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지난 주 북한군의 도발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들은 이러한 불장난이 곧 자신들을 불 태우는 일임을 모르는 것 같다.
072
駟不及舌(사불급설)
駟(사마 사) 不(아닐 불) 及(미칠 급) 舌(혀 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에는 경솔한 말을 경계한 대목이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위(衛)나라 대부(大夫)인 극자성(棘子成)이 [군자는 바탕만 있으면 되었지 문(文)이 왜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자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안타깝습니다. 그대의 말씀은 군자의 말씀입니다.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 미치지 못합니다(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문(文)이 질(質)과 같고 질(質)이 문(文)과 같다면,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다는 것입니까?]
송(宋)나라 구양수(歐陽修)의 필설(筆說)에도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한번 입을 떠나면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쫓기 어렵다(一言旣出, 駟馬難追)]라는 대목이 있다. [駟不及舌(A word, once uttered, is beyond recall)]은 [駟馬難追(Four horses can't overtake it -- a spoken word)]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을 신중하게 해야함을 비유한 표현이다. 모 정당의 경선 후보들은 자신들이 쫓아 갈 수도 없는 약속을 마구 해대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공약(空約) 남발하는 연습을 미리 하고 있다는 것이다.
073
喪家之狗(상가지구)
喪(죽을 상) 家(집 가) 之(-의 지) 狗(개 구)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초라한 모습을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공자(孔子)는 제자들을 데리고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였다. 정(鄭)나라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버린 공자는 하는 수 없이 동문(東門)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초조해진 공자의 제자들은 모두 나뉘어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며 그를 찾았다. 제자들중에서 자공(子貢)이 가장 열심히 사방으로 스승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정나라 사람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같고, 그 목은 고요(皐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렇지만 허리 아래로는 우(禹)임금에 세치쯤 미치지 못하였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초상집의 개(若喪家之狗)와 같았소.]
제자들을 만난 공자는 자공의 이러한 말을 듣고 [용모에 대한 말을 맞다고 하기 어렵지만 초상집 개 같다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라고 했다. [喪家之狗]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초라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며, 연말 대선에서 패배한 용들의 모습 또한 이러하리라.
074
酒池肉林(주지육림)
酒(술 주) 池(못 지) 肉(고기 육) 林(수풀 림)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상(商)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방탕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주왕은 본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현명한 임금이었으나, 달기(?己)라는 요부에 빠져 그만 극악무도한 폭군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잔혹한 형벌을 고안해 내어 자신을 반대하는 관리나 백성들을 불에 태워 죽이면서, 여기에서 쾌락을 느꼈다.
그는 향락을 위하여 높이가 천척(千尺)에 달하고 둘레가 삼리(三里)나 되는 궁전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7년 동안 노역케 하였다. 화려한 궁실(宮室)이 완성되자 각지의 준마(駿馬), 명견(名犬), 미녀(美女) 등을 수집하여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이것으로도 부족했던 그는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덩이를 걸어 숲을 이루게(以酒爲池, 懸肉爲林)한 다음, 많은 젊은 남녀들로 하여금 발가벗고 서로 희롱하고, 음탕한 음악과 음란한 춤을 추게 하며, 자신도 먹고 마시면서 이러한 광란의 잔치를 감상하였다.
[酒池肉林(sumptuous feast)]이란 [지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술자리나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기업들의 연이은 부도 속에서도 향락 산업만은 불황을 모른다고 한다.
075
同心同德(동심동덕)
同(한가지 동) 心(마음 심) 同(한가지 동) 德(덕 덕)
상서(尙書) 태서(泰書)에는 단결을 호소하는 주(周) 무왕(武王)의 외침이 기록되어 있다. 상(商)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포학무도한 정치는 제후(諸侯)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제후들 가운데, 주나라 문왕(文王) 희창(姬昌)의 아들인 희발(姬發)은 아버지를 이어 무왕으로 즉위한 후, 곧 제후들을 이끌고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주나라 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맹진(孟津)이라는 곳을 통해 황하를 건너, 상나라의 도읍인 조가(朝歌)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가성의 남쪽 들에서 진군의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상나라 주왕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 밝히면서 정벌군의 협심과 단결을 외쳤다.
[억조의 평범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으나 마음이 떨어지고 덕에서 떠나 있고, 나는 다스리는 신하 열 사람이 있으나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고 있소(予有亂臣十人, 同心同德). 비록 친한 사람들이 있다하더라도 어진 사람만 못하오.]
[同心同德]이란 [일치단결된 마음]을 뜻한다. 어려움에 처한 한 자동차 회사의 사원들이 회사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들의 단결된 마음과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았으면 한다.
076
胸有成竹(흉유성죽)
胸(가슴 흉) 有(있을 유) 成(이룰 성) 竹(대 죽)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동파문집(東坡文集)49에는 운당곡언죽기(?孕谷偃竹記)라는 글이 있다. 동파라는 호로 유명한 소식은 문장뿐만 아니라 서화(書畵)에도 능하였다. 그에게는 자(字)가 여가(與可)인 문동(文同)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또한 문장과 서화에 모두 뛰어났다.
소식은 정치적으로는 불우하였으나, 그가 그린 대나무와 그 기법은 옥국법(玉局法)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일찍이 화죽기(花竹記)라는 책에서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마음 속에 대나무을 완성해야 한다(故畵竹, 必先成竹于胸中)]라고 하였다. 그의 친구 문여가는 생동적인 대나무를 그리기 위하여, 많은 대나무를 심어 두고 매일 관찰하며, 대나무의 특징과 모습을 기억해 두었다. 당시 유명한 한 문인은 [문여가가 대나무를 그릴 때, 완전한 대나무가 이미 그의 가슴속에 있었다(與可畵竹時, 成竹已在胸)]라고 칭송하였다.
[胸有成竹]은 [成竹在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을 하기 전에 완전한 계획을 구상하여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지금도 [成竹]은 [속셈]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대쪽(?) 인물이 대선후보로 결정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벌써 [成竹]이 있었던 것이다.
077
難兄難弟(난형난제)
難(어려울 난) 兄(맏 형) 難(어려울 난) 弟(아우 제)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동한(東漢)시기, 영천(潁川)의 허(許)지방에 진식(陳寔)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 그는 생활이 검소하여 집안에 하인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있었다. 큰 아들의 이름은 기(紀)이고 자(字)는 원방(元方)이었으며, 작은 아들은 이름이 담(湛)이고 자(字)는 계방(季方)이었다. 이들 또한 모두 명망이 드높은 인물들이었다. 원방에게는 장문(長文)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계방에게는 충(忠)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각각 자기의 아버지의 공적을 다투었는데, 끝내 해결할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묻기로 하였다. 진식은 [원방은 형이 되기 어렵고, 계방은 동생이 되기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대답하였다. 두 손자는 이 말을 듣고 모두 만족하여 물러났다.
[難兄難弟]란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서로 엇비슷하여 우열을 분간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이다. 일본,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과 9승에 도전하는 박찬호. 이들은 [難兄難弟]의 좋은 예이다.
078
泰山壓卵(태산압란)
泰(클 태) 山(뫼 산) 壓(누를 압) 卵(알 란)
진서(晉書) 손혜전(孫惠傳)에는 한 장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晉)나라 때, 손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부와 부친은 모두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관리를 지냈다. 당시 진나라는 각지역 황족들의 다툼으로 몹시 혼란한 와중에 있었다. 손혜는 처음 제(齊)나라의 사마(司馬) 경(?)의 부하로서, 조왕(趙王) 사마 윤(倫)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후 성도(成都)의 왕 사마 영(潁)의 장군이 되어 장사(長沙)의 왕 사마 의(義)를 정벌하러 가기도 했으나, 이후 그는 한때 은거생활을 하였다. 동해(東海)의 왕 사마 월(越)이 군사를 일으켜 그 세력이 커지자, 그는 사마월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를 칭송하였다. [그대의 깃발이 한번 휘날리면 오악(五岳)이 무너지고, 그대의 입김 한번이면 강물이 거꾸러 흐르니, 그대의 이러한 힘으로 역사의 흐름을 밀고 나아가 반역의 무리들을 토벌하고, 정의를 바로 잡으소서. 이는 실로 ?? 맹수가 여우를 삼키고, 태산이 계란을 깔아 뭉개고, 작은 불씨가 바람을 타고 넓은 들을 태우는 것처럼(泰山壓卵, 因風燎原), 쉬운 일입니다].
[泰山壓卵]이란 [매우 강하여 상대가 없거나 일이 매우 용이함]을 비유한 말이다.
079
實事求是(실사구시)
實(열매 실) 事(일 사) 求(구할 구) 是(옳을 시)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는 학문을 즐겼던 한 왕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의 경제(景帝)에게는 유덕(劉德)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유덕은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현)에 봉하여지고 하간왕이 되었다. 그는 고서(古書)를 수집하여 정리하기를 좋아하였다. 진시황이 모든 책을 태워버린 이후 고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지않은 책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오기도 하였다.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도 하간왕 유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진(秦)나라 이전의 옛책들을 그에게 받쳤으며, 일부 학자들은 직접 하간왕과 함께 연구하고 정리하기도 하였다.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하자, 유덕은 한무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고대의 학문을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그는 학문 탐구를 즐길뿐만 아니라 옛날 책을 좋아하며, 항상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낸다(修學好古, 實事求是)]라고 말했다.
[實事求是(By verification of the facts to get the truth)]란 [실제에 근거하여 진리를 밝혀 냄]을 뜻하며, 바로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이다.
080
以卵擊石(이란격석)
以(-써 이) 卵(알 란) 擊(부딪칠 격) 石(돌 석)
묵자(墨子) 귀의(貴義)편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기, 묵자는 노(魯)나라를 떠나 북쪽의 제(齊)나라로 가는 길에 점장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 점장이는 묵자에게 북쪽으로 가는 것이 불길하다고 말했다. 묵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계속 북쪽으로 향하여 치수(淄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치수의 물흐름이 너무 빨라 건널 수 없게 되자 묵자는 다시 돌 수 밖에 없었다.
되돌아 오는 묵자를 보고 그 점장이는 거만하게 굴며 묵자의 기분을 건드렸다. 묵자는 제나라에 가지 못하게 된 판국에 점장이의 비웃음까지 받게 되자, 몹시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말은 근거없는 미신이오. 당신의 말을 믿는다면 천하에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러한 말로써 나의 말을 비난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돌을 치는 것과 같소(以其言非吾言者, 是猶以卵投石也). 천하의 계란을 다 없앤다 해도 돌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오.]
[以卵擊石]은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뜻이니, 이는 곧 [손해만 볼 뿐 이익이 없는 어리석은 일]을 비유한 말이다.
081
起死回生(기사회생)
起(일어날 기) 死(죽을 사) 回(돌이킬 회) 生(날 생)
사기(史記) 편작창공(扁鵲倉公)열전에는 춘추(春秋)시대의 명의(名醫) 진월인(秦越人)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월인은 당시 의원(醫員)이었던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워 천하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설속의 신의(神醫)인 편작(扁鵲)이라 호칭하였다.
백성들을 치료해 주며 천하를 돌던 어느 날, 그는 괵(?)나라를 지나면서 멀쩡하던 태자(太子)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왕의 부름으로 입궐하여 태자의 상태를 검사하였다. 태자는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 진월인은 태자에게 침을 놓았다. 잠시 후, 태자가 깨어나자, 그에게 처방문을 써주었다. 그의 처방대로 치료를 받은 태자는 한 달도 못되어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진월인이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는 [저는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그로 하여금 일어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越人非能生死人也. 越人能使之起耳).]라고 하였다.
[起死回生(Restoration of the dead to life)]이란 [죽을 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살아남]을 뜻한다. 요즘 이 말을 보면 [起亞 回生]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082
一國三公(일국삼공)
一(한 일) 國(나라 국) 三(석 삼) 公(공변될 공)
춘추좌전 희공(僖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진(晋)나라의 군주인 헌공(獻公)은 공자(公子)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위하여 대부(大夫)인 사위(士蔿)를 시켜서 포(蒲)땅과 굴(屈)땅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의 축성작업에 불만을 품은 이오는 헌공에게 호소하였다. 크게 노한 헌공의 문책에 사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이 없는데도 성을 쌓으면 그 성은 적군에게 이용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견고하게 쌓아 훗날 적에게 진지로 이용당한다면, 이는 곧 불충(不忠)의 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실하게 쌓는다면 이는 임금에 대한 불경(不敬)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불충불경의 죄를 범하였으니 어떻게 해야합니까? 덕으로 나라가 안정되어 후대가 견고하다면, 이보다 나은 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집에 돌아와서 [여우가죽 옷 갈래갈래 찢어지듯, 한 나라에 세 임금 있으니, 내 누구를 따라야 할꼬(狐?尨茸, 一國三公, 吾誰適從)!]라는 시를 읊었다. [一國三公]이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구구한 의견을 제시함]을 비유한 말이다. 지난 주 여야 대선 후보들의 TV토론회가 방영되었는데, 바로 [一國三公]의 형상이었다.
083
騎虎難下(기호난하)
騎(말탈 기) 虎(범 호) 難(어려울 난) 下(아래 하)
수서(隋書) 독고황후전(獨孤皇后傳)에는 수나라의 건국에 관한 대목이 있다. 남북조(南北朝)시기, 북주(北周)의 자사(刺史)인 양견(楊堅)은 북주 대사마 독고신(獨孤信)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독고신의 또 다른 딸은 주나라 명제(明帝)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양견은 또 자신의 맏딸을 명제의 아들인 선제(宣帝)에게 시집보내어 황후가 되게 하였다.
서기 580년, 선제가 세상을 떠나자 8세된 정제(靜帝)가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때 양견은 정제를 보좌하며 쉽게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 독고씨는 양견이 이미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제위를 차지하도록 종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의 일이 이미 이렇게 된 바, 당신은 맹수의 등에 올라탄 것과 같으니,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大事已然, 騎獸之勢, 必不得下).]
581년 3월 정변(政變)을 일으킬 시기가 되었다고 확신한 양견은 마침내 정제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수(隋)나라 문제(文帝)였다.
[騎虎難下(Needs must when the devil drives)]는 [騎虎之勢]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미 시작된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084
班門弄斧(반문농부)
班(나눌 반) 門(문 문) 弄(희롱할 롱) 斧(도끼 부)
명(明)나라 매지환(梅之渙)은 이태백의 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여 제이백묘시(題李白墓詩)라는 시를 썼다. 태백(太白)이라는 자(字)로 더 유명한 이백은 술을 매우 즐겼으며, 사람들은 그를 이적선(李謫仙)이라 하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들이 있다. 채석강에서 익사했다거나, 풍랑과 함께 나타난 거대한 고래와 신선들이 강에 배를 띄우고 놀고 있던 그를 데리고 하늘로 사라졌다고 하는 것 등이 그렇다.
훗날 채석강 부근에는 이백의 묘를 비롯한 적선루, 착월정 등의 많은 명승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많은 문인들도 이곳에서 시흥(詩興)를 느꼈다. 이렇다보니 시를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저마다 한 수씩를 읊어대게 되었다. 시인 매지환은 나무 공예, 즉 목장(木匠)의 시조라는 노반(魯班)의 고사을 인용하여 이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풍자하였다.
[채석강변에 한 무더기 흙, 이백의 이름 천고에 높은데, 오고 가는 사람마다 시 한수씩 읊조리니, 노반의 문앞에서 도끼 자랑하는도다(來來往往一首詩, 魯班門前弄大斧)]
[班門弄斧(Teach a dog to bark)]란 [전문가 앞에서 얄팍한 재주를 뽐냄]을 비유한 말이다.
085
傑犬吠堯(걸견폐요)
傑(뛰어날 걸) 犬(개 견) 吠(짖을 폐) 堯(요임금 요)
사기(史記) 노중련추양(魯仲連鄒陽)열전에는 한(漢)나라 경제(景帝)때의 유명한 학자인 추양(鄒陽)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처음에, 추양은 뛰어난 문장력과 언변을 가지고 오왕(吳王) 수하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오왕이 반란을 꾀하자, 그는 이를 따르지 않고 간언하는 글을 올렸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추양은 양(梁)나라 효왕(孝王)에게 귀순하였다.
그러나 효왕의 심복들은 추양의 재능을 시기하여, 효왕에게 그를 중상모략했다. 크게 노한 효왕은 추양을 구금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는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효왕에게 글을 올려 모략당한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모두 충절지사였음을 말하고, 사실을 정확히 살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글에서 [어진 선비에게 벼슬과 봉록을 베푼다면, 포악한 걸왕의 개라도 성왕(聖王)인 요임금에게 대들어 짖게 할 수 있다(傑之狗可使吠堯)]라고 하였다. 양 효왕은 이 글에 매우 감동하여, 그를 석방하였다.
[傑犬吠堯]란, 하(夏)나라 폭군 걸왕이 부리는 개가 그의 명을 받고 요임금과 같은 성왕(聖王)에게도 짖고 덤벼드는 것처럼 [자기가 섬기는 사람에게는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충성을 다함]을 비유한 말이다.
086
靑天霹靂(청천벽력)
靑(푸를 청) 天(하늘 천) 霹(벼락 벽) 靂(벼락 력)
송(宋)나라에 육유(陸游:1125-1210년)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평생 광범한 제재(題材)로 1만여수의 시를 썼으며, 인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내면서 고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의 저작 중의 하나인 검남시고(劍南詩稿)에는 사일야계미명기작(四日夜鷄未鳴起作)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동안 병상에서 지냈던 그는, 음력 9월 어느 가을 날 닭들도 채 일어나지 않은 아침에, 이 시에서 자신의 적막한 만년(晩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내 병든 채 가을을 보내려다, 문득 일어나 붓을 놀리니, 마치 오래동안 틀어박혀 있던 용이, 푸른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치듯 하네(正如久蟄龍, 靑天飛霹靂)]
육유는 병들어 드러 누워있던 자신이 갑자기 붓을 들어 시를 짓는 행동을 맑은 하늘에서 용이 벼락을 치는 것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靑天霹靂(a bolt from the blue sky)]이란 본시 [갑작스런 행동]을 뜻했으나, 지금은 [뜻밖에 발생한 재난(災難)이나 변고(變故)]를 비유한 말로 쓰인다. 괌에서 발생한 KAL기 추락사고는 [靑天霹靂] 바로 그 자체였다.
087
杯盤狼藉(배반낭자)
杯(잔 배) 盤(소반 반) 狼(이리 랑) 藉(깔개 자)
사기(史記) 골계(滑稽)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있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 위왕(衛王)은 주색을 즐겨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초(楚)나라가 공격해 오자 언변에 능한 순우곤(淳于?)을 시켜 조(趙)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다. 조나라 도움으로 초나라 군대가 물러가자 위왕은 크게 기뻐하며 순우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주량을 묻는 위왕에게 순우곤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라고 대답하며, 그 까닭을 설명했다. [대왕 앞에서는 황공하여 한 말이면 취해 버리지만, 만약 남녀가 함께 앉아 마신다면, 여덟 말쯤 마셔야 취하게 됩니다.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절정에 이르고, 남녀가 한 자리에서 무릎을 맞대고 신발이 뒤섞이며, 잔과 접시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履旴交錯, 杯盤狼藉), 아름다운 주인 여자가 저 한 사람만 머물게 한다면 ?? 저는 마음이 즐거워져서 한 섬 술도 마실 수 있습니다.]
[杯盤狼藉(Cups and plates are all in disorder after a feast)]란 [잔치가 파할 무렵이나 파한 뒤의 어지러운 술 자리]를 형용한 말이다. 피서철인 요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떠들석한 술자리와 산더미같은 쓰레기가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088
華而不實(화이부실)
華(꽃 화) 而(말이을 이) 不(아닐 불) 實(열매 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진(晉)나라 대신(大臣) 양처보(陽處父)는 위(衛)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魯)나라 영성(娩城)의 한 집에 묵게 되었다. 집 주인 영(?)은 양처보의 당당한 모습과 비범한 행동을 보고 그와 함께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양처보의 동의를 얻은 후, 영은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를 따라 길을 나섰다. 그런데 영은 온(溫) 땅에 이르자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다. 영의 아내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에 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다만 사납고 강한 성질로만 처세하고,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속으로는 덕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집중시키고 있소(且華而不實, 怨之所聚也). 이러한 사람을 따른다면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지도 못하고 이익은 커녕, 도리어 그의 재난에 관련될 것을 두려워했소. 그래서 나는 그를 떠나 돌아 온 것이오.]
[華而不實(Flowery but bears no fruit)]이란 [사람이나 사물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알맹이가 없음]을 비유한 말로서, 곧 사람들의 가식과 허영을 경계하고 있다.
089
不寒而慄(불한이율)
不(아닐 불) 寒(찰 한) 而(말 이을 이) 慄(떨 률)
사기(史記) 혹리(酷吏)열전에는 혹독한 관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중앙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호족 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채용하였다. 당시, 의종(義縱)이라는 사람은 왕태후의 총애를 받은 누님의 덕택으로 현령과 도위를 지내다가, 남양 태수를 거쳐 다시 정양 태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는 남양태수로 재임하면서, 도위(都尉)였던 영성(寧成)의 일가를 죽인 바 있어, 이미 법 집행이 엄격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정양 태수로 부임하자, 정양군내의 호족세력을 평정한 후, 2백여명의 범죄자들을 체포하였다. 동시에 그는 사적(私的)으로 감옥에 드나들며 죄인들을 면회한 사람들을 죄수 탈옥 기도죄로 구속하였다. 의종은 [이 자들은 사형수들을 탈옥시키려 하였다]라고 판결하고, 그 날 중으로 4백여 명을 전원 죽였다. 이후 군내의 호족들과 백성들은 춥지 않아도 벌벌 떨었으며(其後郡中不寒而慄), 교활한 자들은 알아서 관리에게 협력하여 공무를 도왔다.
[不寒而慄(Trembling without being cold)]은 [몹시 두려운 상황]을 형용한 말이다. 무더위 속에서 공포 영화를 즐기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090
不恥下問(불치하문)
不(아닐 불) 恥(부끄러워할 치) 下(아래 하) 問(물을 문)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는 배움의 태도를 일깨워주는 대목이 있다.
춘추(春秋)시기, 위(衛)나라 대부(大夫)였던 공어(孔?)는 매우 겸손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찬사와 칭송을 받았다. 공어가 죽자, 위나라 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호학(好學) 정신을 배우고 계승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문(文)]이라는 봉호(封號)를 하사하였다.
당시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위나라의 자공(子貢)은, 공어에게는 잘못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만큼 그렇게 훌륭하지 않으며, 또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자공은 스승인 공자에게 [공어의 시호(諡號)는 무엇 때문에 문(文)이라 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말하길 [그는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랫사람에게도 묻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敏而好學, 不恥下問). 그래서 그를 문(文)이라 하였던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不恥下問(Not ashamed to ask of one's inferiors)]은 [하문불치(下問不恥)]라고도 하는데, 이는 [분발하여 학문을 함에 마음을 비우고 가르침을 구하는 정신]을 형용한 말이다.
091
人琴俱亡(인금구망)
人(사람 인) 琴(거문고 금) 俱(함께 구) 亡(죽을 망)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편에는 죽음에 대한 애상(哀傷)을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동진(東晋)의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 왕휘지(王徽之:字는 子猷)와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字는 子敬) 형제가 모두 병에 걸렸는데, 동생인 자경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형 자요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찌 자경의 소식은 없는 것입니까? 그 얘가 이미 죽은 게 아닙니까?]라고 물으면서 조금도 슬퍼하거나 울지는 않았다.
형 자요는 즉시 수레를 타고 동생의 빈소로 달려가서는 동생의 관(棺) 위에 올라가 동생이 평소에 좋아하였던 거문고를 꺼내들고 타보았다. 그러나 거문고가 소리를 내지 않자, 자요는 이를 내던지며 [자경아, 자경아, 너와 거문고가 함께 죽었구나(子敬, 子敬, 人琴俱亡)]하면서 한참동안이나 애통하였다. 한 달쯤 지나 형 자요도 그만 세상을 떠났다.
[人琴俱亡]은 [인금병절(人琴幷絶)]이라고도 하며,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哀悼)의 정(情)]을 비유한 말이다. 하지만 울부짖음만으로 애통함을 달래야 하는 KAL기 희생자 유가족들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역시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092
白眉(백미)
白(흰 백) 眉(눈썹 미)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권39에는 마씨(馬氏) 5형제에 관한 기록이 있다. 마량(馬良:서기187-222년)은 양양(襄陽) 의성(宜城) 사람으로서 자(字)는 계상(季常)이었는데, 동네에서는 흔히들 [마씨 다섯 형제 중, 흰눈썹이 가장 낫다네(馬氏五常, 白眉崔良)]라고 하였다. 마량과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성어(成語)의 주인공인 마속 등 다섯 형제는 모두 재주가 뛰어났으며, 그들의 자(字)에 모두 [常]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오상(五常)]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들 형제 중 맏이인 마량의 눈썹에는 흰털이 나있었는데, 그의 재능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흰 눈썹이 최고]라고 하였던 것이다.
유비(劉備)는 촉(蜀)땅에 들어와서 마량을 좌장군연(左將軍?)으로 임명하였으며, 제위(帝位)에 즉위한 후에는 그를 시중(侍中)에 등용하였다. 마량은 유비를 수행하여 이릉(夷陵)전투에 참가하였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白眉(The best of all)]란 [여러 사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흰 눈썹으로 유명한 한 인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고 한다. 과연 [白眉]의 값을 하는지는 지켜 보아야 할 일이다.
093
多多益善(다다익선)
多(많을 다) 多(많을 다) 益(더할 익) 善(착할 선)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에는 한신(韓信)에 관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진(秦)나라 말기,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봉기하였다. 한신은 먼저 항우(項羽)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중용(重用)되지 못하자, 다시 유방(劉邦)의 휘하로 옮겼다. 유방은 황제가 되자, 한신의 병권(兵權)을 없애고, 그가 모반을 꾀하였다고 하여 그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체포된 한신에게 유방은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얼마나 많은 군사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한신은 [폐하께서는 불과 10만의 병마를 통솔하는 장수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유방이 다시 [그렇다면 그대는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한신은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臣多多而益善耳).]라고 하였다.
이에 유방은 [이처럼 용병(用兵)에 뛰어난 그대가 어찌하여 나에게 붙잡히게 되었는가?]라고 묻자, 한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폐하는 장병을 거느리는 장수는 될 수 없으나 장수들을 이끄는 장수는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폐하께 잡히게된 까닭입니다.]
[多多益善(The more the better)]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음]을 뜻한다.
094
如魚得水(여어득수)
如(같을 여) 魚(고기 어) 得(얻을 득) 水(물 수)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諸葛亮)전에는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의 심정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동한(東漢) 말기, 천하가 대란(大亂)에 휩싸이자, 각 세력들과 다투던 유비는 인재(人才)를 찾고 있었다. 그는 제갈량이라는 인재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 직접 세 차례나 그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제갈량의 도움으로 유비는 촉한(蜀漢)을 건국하고, 조조, 손권과 삼국정립(三國鼎立)의 국면을 형성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매우 존경하였으며, 제갈량 또한 유비의 대우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유비는 중대한 일들에 대하여 제갈량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태도에 불만이었다. 이에 유비는 그들에게 [내가 제갈량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으니(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자네들은 다시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게.]라고 말했다.
[如魚得水(Like fish getting water)]란 [수어지교(水魚之交)] [수어지친(水魚之親)]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얻거나 자신에게 매우 적합한 환경을 얻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095
邯鄲學步(한단학보)
邯(땅 이름 한) 鄲(조나라 도읍 단) 學(배울 학) 步(걸음 보)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 의 한단(邯鄲) 사람들의 걷는 모습이 특별히 멋있었다고 한다. 연(燕)나라의 수릉(壽陵)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은 한단 사람들의 걷는 모습을 배우기 위해 직접 한단에 갔다. 그는 매일 한단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서 따라 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원래의 걷는 방법을 버리고, 걷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한걸음 한걸음 발을 뗄 때마다, 발을 어떻게 들고 또 어떻게 놓는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다리의 조화와 걸음의 폭 등에 대해서도 주의해야만 했다. 이렇다보니 그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몹시 힘이 들었다. 몇 달이 지났지만, 그는 한단 사람들의 걷는 법을 배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원래 걷는 법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네발로 기어서 자기 나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邯鄲學步]는 [한다지보(邯鄲之步)]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를 내면 양쪽을 다 잃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 왜색(倭色) 패션이 유행되고 있다한다. 혹시 이름까지 바꾸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096
老馬之智(노마지지)
老(늙은이 로) 馬(말 마) 之(-의 지) 智(슬기 지)
한비자(韓非子) 세림상(說林上)에는 경험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춘추(春秋)시기,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제일의 위치를 차지하자, 많은 소국(小國)들은 제나라의 명을 받듬으로써 제나라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당시, 산융(山戎)이라는 나라가 제나라에 의지하고 있던 연(燕)나라를 침범하자, 환공은 산융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663년, 제나라는 산융을 크게 물리치고 도읍을 점령하였다. 산융의 국왕인 밀로(密盧)가 고죽국(孤竹國)으로 도망하자, 환공은 계속하여 고죽국을 공격하였다. 제나라는 봄에 고죽국을 공격하였으나, 고죽국의 장군인 황화(黃花)가 지형을 이용하여 응전하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전쟁은 겨울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제나라 군대는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려는데,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함께 참전하고 있던 국상(國相) 관중은 [이럴 때는 늙은 말의 지혜를 써보는 게 좋겠소(老馬之智可用也)]라고 말하고, 늙은 말 몇 마리를 골라 대열의 앞에서 마음껏 달리도록 하였다. 제나라 군대는 그 말들의 뒤를 따라 곧 출로를 찾아 귀환할 수 있었다.
[老馬之智(An old dog for a hard road)]란 [경험 많은 사람의 지혜]를 비유한 말이다.
097
口蜜腹劍(구밀복검)
口(입 구) 蜜(꿀 밀) 腹(배 복) 劍(칼 검)
자치통감(資治通鑒) 당기(唐紀)에는 이임보(李林甫)라는 사람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임보는 당 현종 때의 재상(宰相)으로서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다른 재주도 많아서, 황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는 또 아첨하는 재주가 있어서, 권세 있는 인물들과 자주 접촉하고, 황제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많은 뇌물을 주어 황제의 언행을 항상 파악하여, 황제의 기분에 맞게 처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19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능력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상하고 제거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이임보는 황제가 병부시랑(兵部侍郞) 노현(盧絢)과 엄정지(嚴挺之) 등을 중용하려 하자 그들을 비방하여 그들의 승진을 막기도 하였다.
이임보는 겉으로는 매우 선량하게 좋은 말만을 하였으나, 속으로는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자, 세상 사람들은 마침내 그의 위선적인 면목을 알고 [이임보는 입에는 꿀이 있지만 뱃속에는 칼이 들어있다(李林甫口有蜜, 腹有劍)]라고 말하였다. [口蜜腹劍(A honey tongue, a heart of gall)]이란 [겉으로는 생각해 주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음해할 생각을 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098
亡羊補牢(망양보뢰)
亡(망할 망) 羊(양 양) 補(기울 보) 牢(우리 뢰)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酒色)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大臣) 장신(莊辛)은 경양왕에게 [왕을 수행하는 주후, 하후, 언릉군, 수릉군 등은 사치하고 방탕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간언하였다. 경양왕이 이 말에 몹시 분노하자, 장신은 [만약 신의 말을 믿을 수 없으시다면, 신이 조(趙)나라로 피난하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장신이 떠난 지 다섯 달이 되었을 때, 진(秦)나라는 과연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도읍을 점령하였다. 경양왕은 먼 곳까지 도망하고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장신을 찾아오도록 하여, 그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는지를 물었다. 장신은 [토끼를 발견하고 나서 사냥개를 생각하여도 늦지 않으며, 양이 달아난 후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고 들었습니다(亡羊而補牢, 未爲遲也)]라고 대답하였다.
[亡羊補牢(It is never too late to mend)]란 [일이 발생한 후에라도 대비책을 강구해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각종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한 대비는 결코 늦는 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099
赤子之心(적자지심)
赤(붉을 적) 子(아들 자) 之(-의 지) 心(마음 심)
맹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는 [대인이란 그의 어린 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는 대목이 있다.
[赤]에는 [붉은 색]이라는 뜻이외에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옷을 걸치지 않고 몸을 드러냄]이라는 의미가 있다. [적빈(赤貧)]이란 극빈(極貧)을, [적수(赤手)]란 맨손을, [적지(赤地)]는 불모지를 뜻한다. 순자(荀子)는 참되고 정성스런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적심(赤心)]이라고도 하였다.
[赤子]란 갓 태어난 아이의 몸 색깔이 붉은 색이라는 점에서 [갓난 아이]를 가리키는데, 서경(書經)에서는 [赤子]를 백성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맹자는 순진 무구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진 이를 대인(大人)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니, [赤子之心(a child's heart)]이란 어린 아이의 마음, 즉 [어린 아이 때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을 뜻한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이 선량하고 순결함]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요즘 정치권에는 모 인사의 월북사건으로 적색(赤色)경보(?)가 발령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만사 제처두고 색깔 가리기에 정신들이 없다. 그들은 [赤子]같은 마음으로 좋은 정치만을 기대하고 있는 국민들을 잊고 있는 것이다.
100
名從主人(명종주인)
名(이름 명) 從(좇을 종) 主(주인 주) 人(사람 인)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환공(桓公) 2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름철 4월, 노(魯)나라는 고(?)나라에서 만든 큰 솥을 송(宋)나라로부터 입수하여, 무신(戊申)날에 주공(周公)의 대묘에 바쳤다. ??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이름은 그 주인을 따르고, 물건은 중국을 따르는 법이니(名從主人 物從中國), 고나라의 큰 솥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큰 솥(大鼎)은 본시 고나라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후에 송나라가 이것을 차지하였다가, 다시 송나라의 화보독(華父督)이 환공에게 뇌물로 제공한 것이었다. 따라서 노나라에서는 내력이 복잡한 이 물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공자의 의견을 들었던 것이다.
[名從主人]이란 [사물은 원래 주인의 이름을 따라 짓게 됨]을 뜻하며, 이는 곧 사물의 명칭이 그것의 소재지나 나라의 호칭법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명함에 표기된 보조(?) 국호(國號)로 물의를 일으켰던 모 국회의원은 단순히 한자권 인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몇몇 무식한 중국인들의 편의만을 위해 국민적 자존심을 배려하지 않은 발상에 불쾌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대한민국의 자존심은 스스로 지킬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101
悖入悖出(패입패출)
悖(어그러질 패) 入(들 입) 出(날 출)
대학(大學)에는 덕과 재물과의 관계를 말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군자는 먼저 덕에 조심하는 것이다. 덕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사람이 생기고, 사람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땅이 생기고, 땅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재물이 생긴다.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용도가 생긴다. 덕은 근본이 되고 재물은 말단적인 것이다. 근본이 되는 것을 밖으로 돌리고 말단적인 것을 안으로 들이면 백성들을 서로 다투게 만들고 서로 빼앗는 짓을 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말이 남에게 거슬리게 나가면 역시 자기에게 거슬리게 들어오고, 재물이 남에게 거슬리게 들어오면 역시 자기에게 거슬리게 나가는 것이다(貨悖而入者, 亦悖而出)]라고 하였다.
[悖]는 [도리나 사리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니, [悖入悖出(Ill got, ill spent)]이란 곧 [땀 흘리지 않고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쌓이지 않고 다시 나간다]는 뜻이다.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 일부 주부들의 억대 비밀 도박이 보도된데 이어 미국에서 수십억의 외화(外貨)를 날린 사회지도층 해외도박꾼들이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들은 불의(不義)의 재물(財物)을 탐하여 패가망신(敗家亡身)한 본보기가 된 것이다.
102
老益壯(노익장)
老(늙을 로) 益(더할 익) 壯(씩씩할 장)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한(東漢)시기,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에 부풍군의 독우(督郵)를 지낸 마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군 태수의 명령으로 죄인들을 장안(長安)으로 압송하게 되었다. 그는 죄수들의 형편을 동정하여 그만 도중에서 그들을 풀어주고, 자신은 관직을 버리고 변방으로 도망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조정으로부터 대사면(大赦免)을 받고, 과거의 일을 다시 추궁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항상 열심히 일하였다. 몇년 지나지 않아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가축들도 그 수효가 많아져서, 그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변방으로 도망온 사람들에게 자주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생활이 궁핍할수록 그 의지를 굳게 하고, 나이가 들수록 그 정신을 왕성하게 해야한다(窮當益堅, 老當益壯)]라고 말했다.
[老益壯(Live to agreen old age)]이란 [나이는 비록 많지만 그 활동과 정신이 더욱 강성해짐]을 나타내는 말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대선 후보들의 활동은 쉽게 포기해 버리는 나약한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103
對症下藥(대증하약)
對(대할 대) 症(증세 증) 下(내릴 하) 藥(약 약)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화타전(華?傳)에는 동한(東漢) 말기 뛰어난 의술로 신의(神醫)라는 칭송을 받았던 화타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번은 고을의 벼슬아치인 예심(倪尋)과 이연(李延) 두 사람 모두 고열(高熱)과 심한 두통(頭痛)을 앓게 되었다. 다른 의원들이 와서 그들을 살펴 보았으나 효과가 없자, 결국 화타가 초빙되어 왔다. 그는 두 사람의 상태를 살펴 본 후, 각각 다른 처방을 내렸다. 증상이 똑같은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약을 먹게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화타는 [예심은 신체 외부에 병은 없으나 잘못 먹어 내부에 배탈이 났으므로 사약(瀉藥)을 먹어야 하고, 이연은 신체 내부에 병은 없으나 외부의 영향으로 감기에 걸린 것이니 발산약(發散藥)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對症下藥(There is a slave for every sore)]는 [증세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뜻이며, 이는 곧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고 대처해야함]을 비유한 말이다. 환경문제, 학원 폭력 문제, 기아(起亞) 문제 등을 놓고 말들이 많다. 증세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 맞는 처방을 내려야 할 것이다.
104
亡羊補牢(망양보뢰)
亡(달아날 망) 羊(양 양) 補(기울 보) 牢(우리 뢰)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국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大臣) 장신(莊辛)은 경양왕에게 [왕을 수행하는 주후, 하후, 언릉군, 수릉군 등은 사치하고 방탕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라고 간언하였다. 경양왕이 이 말에 몹시 분노하자, 장신은 자신이 조(趙)나라로 피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
장신이 떠난 지 다섯 달이 되었을 때, 진(秦)나라는 과연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도읍을 점령하였다. 경양왕은 먼 곳까지 도망하고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장신을 찾아오도록 하여, 그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는지를 물었다. 장신은 [토끼를 발견하고 나서 사냥개를 생각하여도 늦지 않으며, 양이 달아난 후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고 들었습니다(亡羊而補牢, 未爲遲也)]라고 대답하였다.
[亡羊補牢(It is never too late to mend)]란 우리 말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와 같은 표현이다. 북한의 이집트 대사 형제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의 한국행 여부와 북한의 외양간 고치기 수법(?)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될 것이다.
105
齊人攫金(제인확금)
齊(나라이름 제) 人(사람 인) 攫(붙잡을 확) 金(쇠 금)
여씨춘추(呂氏春秋) 거유(去宥) 편에는 한 날치기의 이야기가 나온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우 탐욕스럽고 재물(財物)을 좋아하여,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는게 하루 일과였다.
어느날 아침, 그는 의관(衣冠)을 잘 차려 입고 시장으로 구경을 나갔다. 그런데 그는 금(金)을 팔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다. 그는 느닷없이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금을 한 웅큼 웅켜쥐고 도망하기 시작하였다(攫其金而去). 금을 팔던 사람은 [도둑이야, 저 놈이 내 금을 훔쳐간다.]라고 외쳤다. 금을 훔쳐 도망가던 그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 순찰을 돌던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포졸들이 그에게 대낮에 남의 금을 훔쳐간 이유를 묻자, 그는 뻔뻔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금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금만 보았지 사람은 보지 못했소.]
[齊人攫金]이란 [앞 뒤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운반 중이던 2억원대의 돈가방이 대낮에 날치기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제나라 사람을 닮은 범인들은 아직 잡히지 않고 있다고 한다.
106
以火救火(이화구화)
以(-로써 이) 火(불 화) 救(건질 구)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는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인 안회(顔回)의 대화가 실려 있다. 안회는 위(衛)나라로 떠나기에 앞서 스승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는 스승께 [위나라 국왕은 제멋대로 독재를 한다고 합니다. 국권을 남용하고, 백성들 가운데는 죽은 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전에 선생님으로부터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가라. 의사 집에 환자가 많이 모이기 마련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저는 이에 따르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는 [위나라 왕이 어진 이를 반기고 어리석은 자를 싫어한다면, 어찌 너를 써서 다른 일을 하겠느냐? 그는 왕의 권세로 너를 누르며 능숙한 말솜씨로 이기려고 덤벼들 것이니, 이는 불을 끄려고 불을 더하고 물을 막으려고 물을 붓는 일과 같다(是以火救火, 以水救水).]라고 하였다.
[以火救火]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방법을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제 막 시작된 위성 과외를 보충하기 위한 학원 과외가 등장했다 한다. 부담스런 과외를 없애자고 시작한 위성 과외가 불법 변칙 과외를 낳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107
氷山難靠(빙산난고)
氷(얼음 빙) 山(뫼 산) 難(어려울 난) 靠(기댈 고)
자치통감(資治通鑒) 당기(唐紀)에는 부정한 권세의 무상함을 말한 대목이 있다. 당나라 현종은 양옥환(楊玉環)을 특별히 총애하여 그녀를 귀비(貴妃)에 봉하였다. 그녀의 사촌오빠였던 양쇠(楊釗)는 감찰어사에서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는 15개의 관직을 겸하였으며, 현종은 그에게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하였다. 얼마 후, 재상이 된 양국충은 40여개의 관직을 관장하며, 관리를 자기의 마음대로 임명하였다.
당시 관직에 나서지 못한 장단(張彖)이라는 진사(進士)가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양국충에게 가면 금방 관직을 얻어 출세할 수 있다고 하며 그에게 양국충을 찾아가 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단은 그들에게 [자네들은 모두 양국충을 태산(泰山)처럼 든든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는 한 덩이의 빙산에 지나지 않는다네. 장차 천하에 변고(變故)가 있게 된다면, 그는 즉시 태양에 빙산이 녹듯 무너지고 말걸세.]라고 말했다.
[氷山難靠]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이제 빙산과 같은 이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이들이 든든한 태산을 찾아 눈을 돌릴 때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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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君司馬(문군사마)
文(무늬 문) 君(임금 군) 司(맡을 사) 馬(말 마)
사기(史記)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서한(西漢) 시기, 임공(臨?)이라는 곳에 탁왕손(卓王孫)이라는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일찍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혼자 지내는 탁문군(卓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평소 이러한 탁문군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젊고 유능한 사마상여는 연회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문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 날 밤, 탁문군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사마상여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탁왕손은 딸의 이러한 행동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어려운 생활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많은 재물을 주었다. 이렇듯 사마상여와 탁문군은 자신들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행복한 애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文君司馬]란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戀人)]을 비유한 말이다. 숱한 애증(愛憎)의 뉴스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영국의 卓文君(?) 다이애너. 그녀는 사마상여 같은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 찌그러진 자동차 속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
109
骨肉之親(골육지친)
骨(뼈 골) 肉(고기 육) 之(-의 지) 親(친할 친)
여씨춘추(呂氏春秋) 정통(精通)편에는 혈연에 관한 글이 실여 있다.
[주(周)나라에 신희(申喜)라는 사람은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였다. 어느 날, 걸식(乞食)하는 사람이 문밖에 서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 슬퍼서 그것이 얼굴에까지 나타났다. 그래서 문지기에게 그 걸인을 집으로 불러오도록 하여, 그에게 어찌 걸인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보니, 그 걸인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는 본디 한 몸뚱이에서 갈라지고, 동기(同氣)였다가 분리된 것이다. 풀의 꽃과 열매, 나무의 뿌리와 심(芯)처럼, 이 둘은 비록 있는 곳이 다르더라도 서로 통하고, 고통이 있으면 서로 도우고, 근심이 있으면 서로 느끼며, 살아 있을 때는 기뻐하고, 죽으면 서로 슬퍼하는 것이다. 이것이 골육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此之謂骨肉之親).]라고 하였다.
[骨肉之親]이란 곧 [혈육 관계인 부모나 형제의 관계]를 비유한 말이다. 훈 할머니가 55년만에 동생과 올케를 찾았다. 골육의 정이 얼마나 강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110
逆鱗(역린)
逆(거스를 역) 鱗(비늘 린)
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용(龍)은 상냥한 짐승이다. 친하게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목 아래에는 거슬려 난 비늘이 하나 있는데 지름이 한 자나 된다(喉下有逆鱗徑尺). 만일 이것을 건드리는 날이면, 용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 버리게 된다. 군주에게도 또한 이러한 역린이 있다(人主亦有逆鱗).]
용은 본시 상상의 동물이지만, 봉(鳳), 인(麟), 귀(龜)와 더불어 네가지의 영물(靈物), 즉 사령(四靈)중의 하나이다. 또한 용은 비늘(鱗) 달린 짐승 중의 으뜸으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몰고 온다고 한다. 이러 점때문에 중국에서는 군주(君主)를 높여 용에 비유하였다. 용상(龍床)이나 용안(龍顔) 외에도, 황제의 후대를 뜻하는 용자(龍子), 황제의 수레인 용여(龍輿) 등은 그 권위와 존엄성을 나타낸 말들이다.
[逆麟]이란 [군주의 노여움을 일으키는 일]을 비유하며, 군주의 노여움을 사는 것은 [촉역린(觸逆麟)]이라 한다. 여당의 한 경선 낙선자가 정치적 아버지(?)라는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하였다. 하지만 그가 [逆鱗]을 건드릴지의 여부는 조만간 있을 그의 진로 선택에 달려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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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骨悚然(모골송연)
毛(털 모) 骨(뼈 골) 悚(두려워할 송) 然(그러할 연)
화감(畵鑒) 당화(唐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중기, 소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대숭(戴嵩)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소를 그리기 위해 소의 무리속으로 들어가 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소의 생활 습성을 깊게 연구하였다. 그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릴 때면, 그림 속의 소는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쳤으므로,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였다. 특히 그의 [투우도(鬪牛圖)]는 소들이 들에서 활동하고, 장난하며 싸우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으로서, 전체 그림에 야성(野性)의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다.
원(元)나라의 대화가(大畵家)들은 그가 그린 싸우는 소들의 모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마리의 소들이 날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하고 머리 끝이 솟게 한다(二牛相鬪, 毛骨悚然). 그들의 공격하려는 자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가운 기운이 뼈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한다.]
[毛骨悚然(Hair rising and bones feeling)]이란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며 털끝이 쭈삣하여짐]을 뜻한다. 최근 발생한 끔찍한 토막 살인사건과 아동 살인사건 등등. 그 잔인한 수법은 공포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112
鹿死誰手(녹사수수)
鹿(사슴 록) 死(죽을 사) 誰(누구 수) 手(손 수)
진서(晉書) 석륵재기하(石勒載記下)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진(西晉)말기, 후조(後趙)의 국왕인 석륵은 재간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석륵은 외국의 사신들을 연회에 초대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석륵은 신하인 서광(徐光)에게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이전의 어느 제왕(帝王)과 비교될 것 같소?] 서광은 공손하게 [폐하의 지모(智謀)와 무용(武勇)은 모두 한(漢)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을 능가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석륵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은 너무 지나치오. 내가 만약 한나라 고조를 만났더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며 한신이나 팽월 같은 장군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것이오. 만약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와 함께 중원(中原)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재간을 겨루어,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오(未知鹿死誰手).]
[鹿死誰手]란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이다. 한 마리 뿐인 중원의 사슴(鹿)이 과연 어느 후보의 손에 잡히게 될지 지금은 예측하기 어렵기만 하다.
113
車水馬龍(거수마용)
車(수레 거) 水(물 수) 馬(말 마) 龍(용 룡)
후한서(後漢書) 명덕마황후기(明德馬皇后紀)에 실린 이야기다.
동한(東漢)의 명장(名將)인 마원(馬援)의 딸은 한나라 명제(明帝)의 [비(妃)]로 뽑혀 입궁하였다가 얼마후에는 [후(后)]의 자리에 올랐다. 명제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마후(馬后)는 곧 [태후(太后)]로 받들어졌다.
마태후는 재능과 인품이 출중하여 문무백관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으므로, 장제도 그녀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일부 간신들은 태후의 형제들을 제후에 봉해 줄 것을 황제에게 건의하고, 태후에게 아부하려고 생각하였다.
이에 마태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모두 여유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있었소. 그들의 문 앞에 수레들은 흐르는 강물과 같았고, 마필(馬匹)들의 움직임은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교룡(蛟龍)과 같았소(車如流水, 馬如游龍). 내 비록 당시에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오.]
[車水馬龍]이란 [권세있는 자에게 줄을 대보려는 아부꾼들의 차량 행렬]을 묘사한 말이며, [수레들의 왕래가 많아 매우 떠들석한 상황]을 뜻한다.
114
一簞一瓢(일단일표)
一(한 일) 簞(대광주리 단) 一(한 일) 瓢(박 표)
논어 옹야(雍也)편에는 [한 그릇의 밥, 한 쪽박의 물(一簞食一瓢飮)로 누추한 마을에서 살게 되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지지 못할 것이지만, 안회(顔回)는 그렇게 살면서도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대, 안회는 노(魯)나라 사람으로서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으며, 안연(顔淵)이라고도 한다. 그는 총명한 머리에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진지(眞摯)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공자는 그에게 비천한 집안을 떠나 벼슬에 나가라고 권유하였지만, 그는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 안회는 29세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고, 32세에 삶을 마쳤다. 60세가 넘은 그의 스승 공자는 [하늘이 나를 없애는 것이다. 하늘이 나를 없애는 것이다.]라고 하며 제자의 요절에 통곡하였다.
[一簞一瓢]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이라고도 한다. 이는 [극히 소박하고 적은 음식으로 유지되는 청빈(淸貧)한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던 [빈민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났다. 허름한 사리에 구멍 난 스웨터, 양말을 신지 않은 발. 그것은 그녀 생전의 옷차림이었다.
115
名吏利鎖(명강리쇄)
名(이름 명) 吏(고삐 강) 利(이로울 리) 鎖(쇠사슬 쇄)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여우인서(與友人書)]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唐)나라 덕종(德宗) 년간, 못생긴 외모에다 음흉한 마음씨를 가진 노기(盧杞)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어느 날, 노기는 길가에서 풍성(馮聲)이라는 가난한 선비와 마주쳤다. 노기는 여태 그를 멸시해 온터라, 마음대로 그의 주머니를 뒤져 묵(墨) 조각을 찾아내고는 큰 소리로 비웃었다. 그러나 풍성은 점잖게 [이번에는 제가 당신의 짐꾸러미를 한번 뒤져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작은 종이 삼백여장을 찾아냈다. 이는 당시의 명함으로서 고관대작을 방문할 때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풍성은 웃으며 [어찌 된 일입니까? 이렇게 삼백여장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명리(名利)의 노예인 당신과 나를 비교해 본다면, 더 나은 쪽은 누구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名吏利鎖]는 [명예의 고삐]와 [이익의 사슬]을 뜻하니, 이는 곧 [명예와 이익에 얽매어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단일화협상 한답시고 법석떨던 한 후보가 이번에는 내각제 개헌에다 대선 연기를 들먹거렸다. [知難而退]라고 했다. 상황 판단이 끝났으면 알아서 물러나야지, [명리의 노예]임을 자처하는 꼴이 추하기만 하다.
116
米珠薪桂(미주신계)
米(쌀 미) 珠(구슬 주) 薪(땔나무 신) 桂(계수나무 계)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은 각국으로 유세(遊說)를 다니며, 합종책(合從策)을 주장했던 유명한 종횡가(縱橫家)였다.
그가 초나라의 회왕(懷王)에게 합종책을 실행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초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는 사흘을 기다린 끝에 겨우 초회왕을 알현할 수 있었으나, 초회왕이 자신을 소흘하게 대접하는 것 같아 불쾌하였다. 소진은 초회왕이 나타나자 일부러 당장 떠나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의아하게 생각한 초회왕이 그 까닭을 묻자, 소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초나라의 식량은 주옥(珠玉)보다 비싸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 비쌉니다(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제가 주옥같이 비싼 양식을 먹고, 계수나무처럼 비싼 땔감을 태우면서, 어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米珠薪桂]란 [치솟아 오르는 물가]를 비유한 말이며, 영어에는 [Up corn, down horn(곡식 값이 오르면 쇠고기 값이 내린다)]라는 속담이 있다. 추석을 앞두고 쌀과 축산물 등을 중심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있다. 잘만(?) 하면 이번 추석에는 향내 나는 땔감으로 보석(?) 쌀밥을 지어 먹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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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日京兆(오일경조)
五(다섯 오) 日(해 일) 京(서울 경) 兆(조짐 조)
한서(漢書) 장창전(張敞傳)에 실린 이야기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때, 장창은 수도 장안(長安)의 부윤(府尹), 즉 경조윤(京兆尹)을 지냈다. 장창의 친구 양운(楊?)은 총명하고 재능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모함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장창에게는 서순(絮舜)이라는 부하가 있었다. 그는 도적 잡는 [적포연(賊捕?)]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부 대신들이 장창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장창이 곧 파면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실하게 근무하지 않고, 마음대로 놀러 다녔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 양반은 이제 길어봐야 닷새짜리 부윤인데(今五日京兆耳),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창은 즉각 명령을 내려 서순을 체포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형집행에 앞서, 장창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너는 날더러 닷새짜리 부윤이라 하였는데, 이제는 어떠냐?]라는 말을 전했다.
[五日京兆]란 [임직(任職)기간이 너무 짧거나 또는 아무 때나 직위를 떠나 버림]을 비유한 말이다. 서울시장과 경기지사가 드디어 사직하였다. 적어도 5일 이상(?) 출근하였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뻔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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倚門倚閭(의문의려)
倚(의지할 의) 門(문 문) 閭(이문 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王)은 연(燕)나라와 진(秦)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아, 나라의 보물을 모두 빼앗겼다. 또한 제나라 민왕은 위(衛)나라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초나라 대장군 요치(?齒)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제나라 대부인 왕손가(王孫賈)의 어머니는 왕손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소 네가 아침에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면, 나는 항상 문간에 서서 너를 기다린다. 만약 네가 저녁에 나갔다가 한밤중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마을어구까지 나가서 너를 기다릴 것이다. 이제 왕의 행방을 알수도 없고, 지금까지 왕이 돌아오지도 않는데, 너는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느냐?] 왕손가는 어머니의 말씀에 감동되어 즉시 민왕을 찾아 보려고 하였다. 그는 민왕이 이미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여, 사백여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요치의 거처로 쳐들어가서 그를 죽이고 말았다.
[倚門倚閭]란 [자녀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유괴된 딸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살아 돌아 오기만을 기대했던 나리양의 부모. 그들의 마음은 바로 자식 가진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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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不識丁(목불식정)
目(눈 목) 不(아닐 불) 識(알 식) 丁(고무래 정)
신당서(新唐書) 장굉정(張宏靖)전에 실린 이야기다. 당(唐)나라 목종(穆宗) 시기, 정치는 부패하고 관리들의 생활은 방탕하기 짝이 없었다. 유주(幽州) 절도사(節度使) 장굉정의 막료인 위옹과 장종후 등은 매일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즐겼다. 관아(官衙)를 나서고 돌아올 때에는 앞뒤에 호위를 세우고, 등불을 환하게 밝히며 추태를 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하급 군관들이나 사병들은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으며, 항상 그들은 때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어느날, 그들은 수하(手下)의 한 군관을 꾸짖으며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천하에는 전쟁이 없다. 너희들이 아무리 두 석 무게의 석궁을 끌어 당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丁}자 하나 아는 것만도 못하다(汝輩挽得兩石力弓, 不如識一丁字)]라고 하였다.
[目不識丁(Not to know A from a windmill)]이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한자를 모르는 한맹(漢盲)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 졸업자들의 한자능력이 평균 30점도 못된다는 한 조사결과도 나왔다. 학사 학위에 까막눈이라니. 이는 벙어리 영어교육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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眼中釘(안중정)
眼(눈 안) 中(가운데 중) 釘(못 정)
신오대사(新五代史) 조재례전(趙在禮傳)에 실린 이야기다. 오대(五代) 후당(後唐)시대 당(唐)나라의 명종(明宗)이 재위할 때, 송주(宋州)의 절도사로 조재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포악한 정치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반발하거나 불평하지 못했다.
조재례가 송주를 떠나 영흥(永興)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송주 백성들은 모두 [조재례가 떠난다니, 마치 눈에 박힌 못이 빠진 것 같은데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나(眼中拔釘, 豈不樂哉)]라며 기뻐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조재례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곧 황제에게 송주의 절도사로 유임(留任)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황제는 조재례의 뜻이 백성들의 희망때문인 것으로 알고, 그로 하여금 유임하도록 했다. 다음 날, 조재례는 즉각 명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못을 뽑아내는 비용으로 일인당 1천문의 돈을 내도록 하고,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眼中釘(a thorn in the eye)]이란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경기지사를 사직한 인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아들의 병역문제 이후 추락하는 여당 후보, 이제는 두 눈에 푸른 대나무(?) 못이 박힌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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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南捷徑(종남첩경)
終(끝날 종) 南(남녘 남) 捷(빠를 첩) 徑(지름길 경)
신당서(新唐書) 노장용전(盧藏用傳)에 실린 이야기다. 당나라 때, 노장용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시(詩)와 부(賦)에 뛰어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했지만,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조정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곧 당시의 수도인 장안(長安) 근처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일 심신을 수양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노장용은 정말로 황제의 부름을 받고 관직을 얻게 되었다. 부임 길에 오른 그는 몹시 기쁜 마음에 종남산을 가리키며 [이 산 중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도다(此中大有嘉處)]라고 하였다. 이 당시 사마승정(司馬承禎)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벼슬을 하지 않고 종남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노장용의 말을 듣고는 그의 속뜻을 알아 차리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종남산은 벼슬의 지름길일 따름이다(仕官之捷徑耳).]
[終南捷徑]이란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비유한 말이다.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런 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지름길만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122
別無長物(별무장물)
別(나눌 별) 無(없을 무) 長(길 장) 物(만물 물)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진(東晋)시기, 왕공(王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자(太子)의 스승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그가 회계(會稽)에 갔다가 수도인 남경(南京)으로 돌아오자, 왕침(王?)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왕침 또한 태자의 스승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왕공이 새로운 대자리에 앉아 있음을 발견하고, [이 멋있는 대자리는 필시 회계의 명물(名物)일 것이며, 하나만 사가지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왕침이 대자리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자, 왕공은 자기가 앉아 있던 하나뿐인 대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 후, 왕공은 풀로 엮은 헌 자리를 깔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 일이 왕침에게 알려지자, 그는 서둘러 왕공의 집으로 달려와서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왕공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직도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이제껏 저는 물건을 남도록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恭作人無長物).]
[長物]은 [여분(餘分)]이라는 의미이니, [別無長物]이란 곧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갖지 않음]을 뜻한다. 이는 [물욕이 없는 검소한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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割席分坐(할석분좌)
割(나눌 할) 席(자리 석) 分(나눌 분) 坐(앉을 좌)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실린 이야기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관녕(管寗)과 화흠(華歆)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 함께 공부하였지만, 성격은 크게 달랐다. 관영은 검소하고 학문을 즐겨 부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화흠은 그렇지 않았다. 화흠은 한(漢)나라의 태수(太守)를 지내다가, 한때 오(吳)나라의 손책(孫策)의 휘하에서 일을 하였으며, 후에는 위나라의 조비(曹丕)를 도와 한나라를 찬탈하였다. 그러나 관녕은 위나라에서 내린 벼슬을 끝내 사양하였다.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한 돗자리를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멋있는 의관(衣冠)을 입은 높은 관리가 수레를 타고 지나갔다. 관녕은 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책을 읽었으나, 화흠은 곧 밖으로 나가 그 관리의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관녕은 화흠의 태도에 몹시 분노하였다. 그는 칼을 꺼내더니 함께 깔고 있던 돗자리를 반으로 자르고 따로 앉아, [자네는 이제 나의 친구가 아닐세]라고 말했다(寗割席分坐曰:子非吾友也).
[割席分坐]란 [친한 사람과의 절교(絶交)]를 비유한 말이다. 지지도 2위에 빛나는(?) 모 인사가 소속당을 떠났다. 그는 조각난 돗자리에 앉아 고관의 행차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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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東擊西(성동격서)
聲(소리낼 성) 東(동녘 동) 擊(칠 격) 西(서녘 서)
통전(通典)의 병전(兵典)에 나오는 이야기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서로 다투던 시기, 위왕(魏王) 표(豹)의 투항으로 한나라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위왕 표의 협공을 당하는 국면이 되어 매우 위험한 형세에 처하였다. 그는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한신(韓信)을 보내어 정벌에 나섰다.
이에 위왕 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황하의 동쪽 포판(蒲坂)에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의 도하(渡河)를 저지하였다. 한신은 포판의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나, 사병들로 하여금 낮에는 큰 소리로 훈련하게 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강공의 의사를 나타내도록 하였다. 백직은 한나라 군대의 동태를 살펴보고 그들의 어리석은 작전을 비웃었다. 한편으로 한신은 비밀리에 군대를 이끌고 하양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으로 황하를 건넌 한나라 군사들은 신속하게 진군하여 위왕 표의 후방 요지인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그를 사로 잡았다.
[聲東擊西(to make a feint to the east and attack in the west)]란 [동쪽을 칠 듯이 말하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는 뜻으로, [상대방을 속여 교묘하게 공략함]을 비유한 말이다. 개인이나 정치인들의 처세, 또는 운동 경기 등에서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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擧棋不定(거기부정)
擧(들 거) 棋(바둑 기) 不(아닐 불) 定(정할 정)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5년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말기, 즉 기원전 548년 위(衛)나라 대부(大夫) 손임보(孫林父)와 영식(娩殖) 등은 위나라 헌공(獻公)을 축출하고, 그의 동생인 상공(敵公)을 군주로 삼았다. 복귀하려는 계책을 세우던 헌공은 사람을 보내어 영식의 아들인 영희(娩喜)에게 자신을 도와준다면 돌아가서 위나라의 정무(政務)를 그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전했다. 영희는 매우 기뻐하며 곧 협조하겠다고 응답했다.
대숙문자(大叔文子)가 이 소문을 듣고, 영희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걱정하며 말했다. [군자는 행동함에 그 종말을 생각하고, 그대로 행해도 좋은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는 군주 보기를 바둑 두는 일 같이도 여기지 않으니, 어찌 화를 면하랴! 바둑 돌을 들고 놓을 곳을 정하지 못하면 상대를 이기지 못하는데(擧棋不定不勝其?), 하물며 군주를 모시는 일에 주관이 없어서야?] 12년 후, 영희는 군주로 복귀한 헌공의 손에 죽었다.
[擧棋不定]이란 [확고한 주관이 없거나 계획이 수시로 바뀜]을 비유한 말이다. 안개 속의 대선주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헤쳐 모이려(?) 하고 있다. 만지작거리던 바둑 돌을 놓을만한 곳이 이제야 보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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貪賂無藝(탐뢰무예)
貪(탐할 탐) 賂(뇌물 뢰) 無(없을 무) 藝(다할 예)
국어(國語) 진어(晉語) 8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시기, 숙향(叔向)이라는 사람이 한선자(韓宣子)를 만나러 갔다. 한선자가 [나는 명색이 임금 아래에 있는 경(卿)인데도 재물이 많지 않네]라고 말하자, 숙향은 그에게 축하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고사를 들려 주었다.
[옛날 난무자(欒武子)라는 이가 경대부를 지낼 때, 겨우 1백명의 하인에 2백 경(頃)의 땅만을 소유하였으며, 집안에는 조상들에게 제사지낼 그릇조차 변변히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선왕(先王)들의 법령과 덕행으로 일을 처리하여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 받은 그의 아들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워 많은 재물들을 긁어 모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아버지의 덕행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경께서는 난무자처럼 재산이 없으시니, 덕정(德政)을 펴시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기에, 저는 축하를 드렸던 것입니다.]
[貪賂無藝]는 [탐욕무예(貪欲無藝)]라고도 하며, [뇌물을 탐함에 그 끝이 없음]을 뜻한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장들과 고위공무원들의 뇌물수수 소식이 보도되었다. 억대의 현금을 장롱에 쌓아둔 공무원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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鞭長莫及(편장막급)
鞭(채찍 편) 長(길 장) 莫(없을 막) 及(미칠 급)
좌전(左傳) 선공(宣公) 15년조의 이야기다. 춘추시기,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파견한 신주(申舟)는 제(齊)나라로 가는 길에 송(宋)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이 일을 송나라에 통보하지 않았던 까닭에, 그는 피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초장왕은 크게 노하여, 기원전 594년 군대를 동원하여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약소국인 송나라는 초나라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동시에 진(晉)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송나라 사신이 진나라에 도착하자, 진나라 경공(景公)은 곧 출병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대부 백종(伯宗)은 이를 반대하며 경공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출병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채찍이 길다해도 말의 배까지는 닿지 않는다(雖鞭之長不及馬腹)고 했습니다. 하늘이 초나라를 도우고 있으니, 그들과 싸워서는 안됩니다. 진나라가 강하다고 하나, 어찌 하늘을 어길 수야 있겠습니까?]
[鞭長莫及(out of reach)]이란 [돕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했다. 위기에 처한 여당을 바라보는그의 마음은 채찍(?)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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芒刺在背(망극재배)
芒(까끄라기 망) 刺(가시 자) 在(있을 재) 背(등 배)
한서(漢書) 곽광(囍光)전의 이야기다. 서한(西漢)시기.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덟살 된 아들이 소제(昭帝)로서 제위를 계승하였다. 공신의 후손인 대장군 곽광은 한무제의 뜻을 받들어 황제을 보좌하며 국정에 관여하였다. 한소제가 21세로 죽자, 곽광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는 음란하고 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에 곽광은 유하를 폐하고, 한무제의 증손자인 유순(劉詢)을 제위에 앉혔다.
새로 제위를 계승한 한선제(漢宣帝) 유순은 국권(國權)을 주무르는 곽광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한선제가 선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곽광은 직접 수레를 몰고 그를 모셨다. 한선제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카로운 눈에 엄한 표정을 한 곽광을 보며, 수레 안에서 마치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若有芒刺在背) 참기 어려운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죽자, 한선제는 비로소 이러한 느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芒刺在背(A thorn in the flesh)]란 [몹시 불안한 상태]를 비유한 말이다. 경제 대란에다 정치 대란이라는 말이 나돈다. 시원찮은(?) 리더 덕분에 국민들은 늘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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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里霧中(오리무중 )
五(다섯 오) 里(거리 리) 霧(안개 무) 中(가운데 중)
후한서(後漢書) 장해(張偕)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한(後漢)시대, 경전(經典)에 뛰어난 성도(成都)출신의 장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평소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데다, 그와 교제하려는 황족들이나 귀족들까지 그를 자주 찾아왔다. 그는 이러한 붐비는 생활과 벼슬을 싫어하여 산중에 은거(隱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학문외에도 도가(道家)의 도술을 익혀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사방 5리나 안개를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곤 했다. 그 당시 사방 3리 정도의 안개를 일으킨다는 배우(裵優)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술법을 이용하여 도둑질을 하다가 체포되자, 이 도술을 장해에게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이 바람에 장해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五里霧中]이란 거리가 5리나 되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듯 [현재의 상태를 알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인도네시아의 산불 연무(煙霧)의 영향이 인접국에까지 미치고 있는 가운데, 선박들이 충돌하고 여객기까지 추락하였다. 이건 그야말로 [五里霧中]정도가 아니라 [五千里霧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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巢毁卵破(소훼란파)
巢(새집 소) 毁(헐 훼) 卵(알 란) 破(깨질 파)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말기, 공자의 20세손인 공융(孔融)은 한나라 헌제(獻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공융은 일찍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조조(曹操)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 하였다. 때문에 조조는 공융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유비와 손권을 공격하려는 조조의 계획을 반대했던 공융은,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한 대부의 모략으로 조조에게 체포되었다.
공융의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은, 아버지가 잡혀 가던 순간 묵묵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도망하라고 했지만, 공융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새집이 부서졌는데 알이 어찌 깨지지 않겠습니까(安有巢毁而卵不破乎)?]라고 말했다. 공융의 딸은 조조에게 붙잡혀 와서도 [죽은 뒤에 혼령이나마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형의 집행을 기다렸다.
[巢毁卵破]이란 [조직이나 집단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여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단합해서 지켜도 어려운 판국에 스스로 둥지를 부수고 알까지 깨뜨리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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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遂自薦(모수자천)
毛(털 모) 遂(이를 수) 自(스스로 자) 薦(천거할 천)
사기(史記) 평원군우경(平原君虞卿)열전의 이야기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자신의 집에 수많은 식객들을 두고 있었다. 조나라 효왕(孝王) 9년, 기원전 257년,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이에 평원군은 초(楚)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가게 되자, 식객중에서 자신을 수행할 사람 20명을 뽑고자 했다. 몇번이고 고르고 골랐지만 끝내 한 사람을 채우지 못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자신를 추천하고 나섰다. 평원군은 [유능한 사람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송곳처럼 금방 드러나게 되는 법인데, 당신은 삼년 동안이나 내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수는 [제가 지금 초나라 수행을 원하는 것은, 저를 자루 안에 넣어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군께서 저를 좀더 일찍 자루에 넣어주셨더라면, 저의 재능도 일찍 드러났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毛遂自薦]이란 [자신의 재능을 알리며 자기가 자신을 추천함]을 비유한 말이다. 경기 침체에다 기업들의 연쇄 도산등으로 대학가에 취업비상이 걸렸다. 대학에서는 [毛遂就業論(?)]이라는 강좌라도 개설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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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席墨突(공석묵돌)
孔(구멍 공) 席(자리 석) 墨(먹 묵) 突(갑자기 돌)
한(漢)나라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戱)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전국시대는 격렬한 전쟁으로 사회가 몹시 불안하였다. 이에따라 각종 사상이 발생하고 자신의 이상과 견해를 전파하고자 각국으로 유세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자(孔子)와 묵자(墨子) 역시 이러한 사람들에 속한다.
공자는 자신의 학문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많은 제후국들에서 유세하였다. 그리고 노(魯)나라 사람인 묵자는 본시 수공업자 출신으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겸애(兼愛)]를 주장하며, 힘만 믿고 약자(弱者)에게 고통을 주는 전쟁을 반대하였다. 그는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묵자(墨子)]이외에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귀중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였다.
반고는 공자와 묵자의 이러한 유세 활동을 [공자의 자리는 따뜻해 질 틈이 없고, 묵자 집의 굴뚝에는 그을음이 낄 새가 없다(孔席不暖, 墨突不黔)]라고 표현하였다. [孔席墨突]은 [여기저기 몹시 바쁘게 돌아 다님]을 비유한 말이다. 재래시장, 대학, 군부대, 공공 기관 등등, 대선 후보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악수하고 돌아 다니기만 하면 대통령이 되는줄 아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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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視目聽(이시목청)
耳(귀 이) 視(볼 시) 目(눈 목) 聽(들을 청)
열자(列子) 중니(仲尼)편에 실린 이야기다. 춘추시기 노자(老子)의 제자로 항창자(亢倉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귀로 사물을 보고 눈으로 소리를 듣을 수 있었다(能以耳視而目聽)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전해들은 노(魯)나라의 군주는 상경(上卿)의 예(禮)로써 그를 초빙하여, 겸손한 말로 그러한 능력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이에 항창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런 소문은 전한 사람들의 망발입니다. 도가(道家)의 수련에서 눈과 귀를 쓰지 않고도 소리를 듣거나 물체를 볼 수는 있지만 귀와 눈의 기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제가 눈을 쓰지 않고 귀로 물체를 본다는 것과 귀를 쓰지 않고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가장된 것이오니, 이를 사실로 믿지마십시오.]
[耳視目聽]은 본시 도가수련의 한 단계로서 눈과 귀의 도움없이 정신만으로도 보고 듣는 것이 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耳視]란 [직접 보지 않고 소문을 들어서 알아차림]을 뜻하고, [目聽]이란 [직접 듣지 않고 표정을 보고 알아차림]을 뜻하니, [耳視目聽]이란 [사람의 눈치가 매우 빠름]을 비유한 말이다. 자고나면 달라지는 정보화시대. 정보 수집에는 컴퓨터보다는 역시 눈치(?)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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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奇制勝(출기제승)
出(날 출) 奇(기이할 기) 制(마를 제) 勝(이길 승)
사기(史記) 전단(田單)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王)은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가, 연(燕)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제나라는 민왕의 먼 친척인 전단장군의 선전(善戰)으로 거성(?城)과 즉묵(卽墨)성은 잃지 않았다. 그후 연나라의 소왕의 뒤를 이어 혜왕(惠王)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안 전단은 간첩을 보내어 악의와 혜왕을 이간질하였다. 그 결과 연왕은 악의 대신 기겁(騎劫)을 보냈다. 기겁의 학대를 받은 연나라 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전단은 이 틈을 노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한밤중에 꼬리에 횃불을 단 소들을 이용하여 연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사마천은 [손자(孫子)]의 말을 인용하여 전단의 용병술을 묘사하였다. [전쟁이란 정면으로 대치하여 싸우나, 유격(遊擊)인 기병(奇兵)을 가지고 이기는 것이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기병을 쓰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兵以正合, 以奇勝. 善之者, 出奇無窮).]라고. [出奇制勝]이란 [특출한 전략을 이용하여 승리함]을 뜻한다. 일본을 격파한 월드컵 축구팀이 UAE팀 마저 3대0으로 물리쳤다. 선수들의 선전(善戰)과 차감독의 용병술, 그리고 붉은 악마들의 기특(奇特)한 응원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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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門揖盜(개문읍도)
開(열 개) 門(문 문) 揖(읍할 읍) 盜(훔칠 도)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손권전(孫權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 말년, 조정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강동(江東)의 손책(孫策)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강동 오군(吳郡)의 태수인 허공(許貢)은 황제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손책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고자 하였으나, 손책에게 발각되어 죽고 말았다. 한편 사냥을 나갔던 손책은 허공에게 큰 은혜를 입은 식객들이 쏜 화살을 맞아 죽었다.
당시 손책의 아들 손권(孫權)은 겨우 15세. 부친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군정을 살피지 않자, 장소(張昭)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들을 뒤쫓아오고, 이리 같은 놈들이 도처에 숨어 있는데, 자네는 부친의 죽음만을 슬퍼하고 대사(大事)를 돌보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문을 열어 도둑을 맞아들이는 것과 같네(是猶開門揖盜).]
[開門揖盜]는 [개문납적(開門納賊)]이라고도 하며, [스스로 화를 자초함]을 비유한 말이다. O-157균과 O-26균에 골고루 오염된 미국산 수입 식품들이 온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문을 열어 도둑을 맞아들인 우리 검역 관련 기관의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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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代桃僵(이대도강)
李(오얏 리) 代(대신할 대) 桃(복숭아나무 도) 僵(쓰러질 강)
악부시집(樂府詩集)인 상화가사(相和歌辭) 계명(鷄鳴)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어떤 집에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조정의 대신(大臣)이었다. 그들은 표면상 우애가 좋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서로 다투고 시기하였다. 그 중 한 형제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하게 되었는데도, 나머지 형제들은 그의 불행을 즐기는 눈치였다. 벼슬을 하는 형제들이, 황금 장식으로 치장한 말이 끄는 화려한 꽃수레를 타고 고향에 올 때면, 길거리는 늘 구경꾼으로 붐볐다. 그러던 어느 날, 관직에서 쫓겨난 그 형제의 집 우물가에 있던 자두나무가 갑자기 말라 죽었다. 죽은 자두나무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옆에 있던 복숭아나무의 뿌리는 벌레들에게 모두 갉아 먹혀있었다.
이에 관직을 잃은 그 형제는 소리치며 울었다. [자두나무야! 자두나무야! 벌레 먹힌 것은 복숭아나무인데, 네가 죽다니, 이게 무슨 까닭인가?]
[李代桃僵]은 형제가 함께 어려움을 겪으면서 서로 돕고 사랑함을 비유하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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擧措失當(거조실당)
擧(들 거) 措(둘 조) 失(잃을 실) 當(당할 당)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이야기다. 진시황 26년, 즉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시황은 곧이어 전국을 36개 군(郡)으로 나누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였다. 이듬해, 진시황은 위덕(威德)을 선양하기 위하여 천하 주유에 나섰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은 태산(泰山)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시 남쪽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올랐다. 이곳에서 진시황은 낭야대를 쌓고, 비석을 세워 자신의 공덕(功德)과 진나라 왕조의 덕정(德政)을 담은 비문(碑文)을 새겼다. [?진시황께서는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조석으로 게으름을 피지 않으시고, 의혹을 제거하고 법령을 제정하시니 백성들이 모두 법으로 금한 일을 피할 줄 알게 되었다. 지방장관의 직무가 나뉘어서 모든 정무의 시행이 용이해지고, 모든 조치가 타당하여 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擧錯必當, 莫不如畵).]
[擧措失當]이란 [조치가 정당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국산 자동차, 오염된 쇠고기, 칼라 TV 등을 둘러싼 한미간의 통상마찰이 심화되고 있다.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슈퍼 301조의 발동이라는 미국측의 조치는 진시황의 여러 행위에 버금가는 횡포이며, 공평함을 잃은 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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飮水思源(음수사원)
飮(마실 음) 水(물 수) 思(생각할 사) 源(근원 원)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주(北周)에 유신(庾信)이라는 문인(文人)이 있었다. 자(字)는 자산(子山)이었다. 서기 554년, 그는 양(梁)나라 원제(元帝) 소역(蕭繹)의 명을 받들어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유신이 고국을 떠나와 있던 동안, 양나라는 서위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유신은 당시 문단(文壇)에서 그 명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서위의 군주는 그를 강제로 장안에 잡아두고 대관(大官)으로 삼았다. 유신은 고향을 떠나 북조(北朝)에서 28년 동안 머무르며 고향을 매우 그리워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유자산집(庾子山集) 칠권의 징주곡(徵周曲)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일을 먹을 때는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생각하고(落其實者思其樹),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네(飮其流者懷其源).]
[飮水思源]이란 [음수지원(飮水知源)]이라고도 한다. 이는 [근본을 잊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넓게는 국가와 민족, 가깝게는 부모와 고향. 일상 생활에서는 문자 그대로 식수원(食水源).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 그리고 제일 중요한(?) 돈의 근원 등. 이렇듯 우리 주위에는 큰 혜택을 베풀기에 그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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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狼之國(호랑지국)
虎(범 호) 狼(이리 랑) 之(-의 지) 國(나라 국)
사기(史記) 굴원(屈原)열전의 이야기다. 전국(戰國)시대의 최대 강국 진(秦)나라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이 잦았으며, 남쪽 초(楚)나라도 그 위협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초나라 회왕(懷王)의 대신(大臣)으로 있던 유명한 시인(詩人) 굴원은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 회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진나라 장의(張儀)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이에 초 회왕은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장의는 다시 초나라를 방문하여 초왕의 신하와 총비(寵妃)를 매수하고, 초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었다.
얼마 후, 진나라 소왕(昭王)이 초회왕을 초청하자, 굴원은 이것이 함정임을 주장하며 [진나라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으니, 가시지 않는게 좋습니다(秦, 虎狼之國, 不可信, 不如無行).]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에 갔던 초왕은 결국 그곳에서 붙잡혀 죽고 말았다.
[虎狼之國]이란 [포악한 침략국]를 비유한 말이다. 일부 강대국들은 군사적 침략외에도 정치적, 문화적, 특히 경제적 침략을 꾀하고 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정도로는 곤란하다. 지금은 호랑이를 때려 잡는 힘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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吹毛求疵(취모구자)
吹(불 취) 毛(털 모) 求(구할 구) 疵(흠 자)
한비자(韓非子) 대체(大體)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현명한 군주는 지혜로써 마음을 더럽히지 않으며, 사리를 추구함으로써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 또한 법술에 의해 국가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상벌에 의해 시비를 분별하며, 저울에 의해 물건의 경중(輕重)을 분명하게 하고, 그리하여 하늘의 법칙에 역행하지 않으며 사람의 본성을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터럭을 불어 남의 작은 흠을 찾으려 하지 않으며(不吹毛而求小疵), 때를 씻어 알기 힘든 상처를 발견하지 않는다(不洗垢而察難知).]
[吹毛求疵(pick a hole in one's coat)]는 [취모구하(吹毛求瑕)] 또는 [취모멱자(吹毛覓疵)]라고도 한다. [疵]는 병(病)이나 흠, 결점, 과실 등을 뜻하며, [瑕]는 옥의 티, 허물, 잘못 등을 뜻한다. 또 [覓]은 눈위에 손을 올리고 자세히 살펴 보는 것을 뜻하니, [吹毛求疵]란 [고의로 남의 잘못을 들춰냄]을 비유한 말이다. 이는 입으로 털을 불어가며 혹시 보이지 않는 곳에 작은 흠이라도 없는지 살피는 야박한 행동을 나타낸 것이다.
여당에서는 DJ의 비자금을 폭로한다면서 자질구레한 증거자료를 제시하였다. 털을 헤치고 벼룩(?)이라도 잡아 씹어 보려는 원숭이의 모습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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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錦回文(직금회문)
織(짤 직) 錦(비단 금) 回(돌 회) 文(무늬 문)
진서(晋書) 열녀전(烈女傳)의 이야기다. 동진(東晋)시기, 전진(前秦)에 진주자사(秦州刺史)를 지내는 두도(竇滔)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도에게는 소혜(蘇蕙)라는 재주 많은 아내 말고도 조양대(趙陽臺)라는 총희(寵姬)가 또 있었는데, 이들의 사이가 좋지 않아 두도는 무척 고민스러웠다.
훗날 두도가 양양으로 부임하게 되자, 아내인 소혜는 남편이 총희와 함께 가려는 것을 보고 자신은 따라 가지 않기로 하였다. 양양으로 떠난 남편이 자신을 잊어버린 것으로 생각한 소혜는 몹시 상심하였다. 그녀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오색 비단에 글자를 짜넣어 회문시(回文詩)를 지어(織錦爲回文璇圖詩), 남편에게 보냈다. 이에 크게 감동한 두도는 곧 총희를 돌려 보내고 융숭한 예의를 갖춰 아내를 다시 맞아 들였다.
소혜가 지은 [선기도(璇璣圖)]에는 모두 840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들을 종횡, 상하, 좌우 등등 어떻게 읽어도 모두 훌륭한 시가 되었다. 훗날 여러 사람들의 연구 결과 [선기도]의 시는 7,958 수에 달하게 되었다. [織錦回文]이란 [구성이 절묘한 훌륭한 문학작품]을 비유한 말이다. 올 노벨문학상은 이탈리아의 다리오 포가 차지했다. 그는 해학과 진지함 등을 고루 담은 훌륭한 작품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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貪小失大(탐소실대)
貪(탐할 탐) 小(작을 소) 失(잃을 실) 大(큰 대)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 혜왕(惠王)은 군대를 동원하여 촉(蜀)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험한 산세에 길이 없어서 진군(進軍)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진혜왕은 탐욕스런 촉왕을 속이기 위해 실물 크기의 돌소(石牛) 다섯 개를 만들어, 돌소의 꼬리에 번쩍거리는 황금을 달아 놓고, 신우(神牛)가 황금의 변(便)을 본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촉왕이 신기한 돌소에 군침을 흘리자, 혜왕은 촉왕에게 돌소를 대가없이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돌소를 차지하게 된 촉왕은 그것들을 운반해 올 방법이 없었다. 이에 진왕은 그에게 길을 만들어 돌소를 옮겨 가도록 제안했다.
재물에 눈먼 촉왕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길이 뚫리자 진나라의 20만대군은 일거에 촉나라를 멸하고 말았다. 훗날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제(北齊)의 유주(劉晝)는 유자신론(劉子新論) 탐애(貪愛)편에서 이 일을 [촉왕의 멸국망신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작은 이익을 탐하다 큰 이익을 잃어버린 꼴이다(以貪小利失其大利也)]라고 하였다. [貪小失大]란 [작은 이익을 탐하여 큰 이익을 잃어버림]을 뜻한다. 이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는 여러 실수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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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底游魚(부저유어)
釜(가마 부) 底(밑 저) 游(헤엄칠 유) 魚(고기 어)
후한서(後漢書) 장강(張綱)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순제(順帝) 때, 조정에는 장강이라는 하급 관리가 있었다. 그는 충실하고 강직하여 아부를 몰랐다. 당시 대장군으로 양기(梁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황후인 누이를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장강은 공개적으로 황제에게 양기의 불법 행위를 밝혀 조정의 백관들을 놀라게 했다.
얼마 후, 광릉(廣陵)에서 장영(張?)이 사람들을 모아 자사(刺史)를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평소 장강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양기는 이 틈을 이용하여 장강을 제거하고자 그를 광릉의 태수로 임명하였다. 장강은 양기의 계략을 이미 눈치챘지만, 곧 광릉자사로 부임하여 장영을 설득하였다.
장영은 믿음이 가는 장강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저희들은 물고기가 솥바닥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이, 잠시 숨만을 쉬고 있을 뿐입니다(若魚游釜中, 喘息須臾間耳). 이처럼 대인께서 명철하시니 저희들은 기꺼이 조정에 귀순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釜底游魚]란 [상황이 극히 위험한 상태에 이름]을 비유한 말이다. 대권제일(?)이라는 정치논리에 밀려난 경제가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다. 쓰러지는 기업, 폭락하는 주가. 그야말로 솥바닥에서 팔딱거리는 붕어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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廢寢忘食(폐침망식)
廢(폐할 폐) 寢(잠잘 침) 忘(잊을 망) 食(밥 식)
송사기사본말(宋史記事本末) 왕안석변법(王安石變法)에 실린 이야기다. 북송(北宋)시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인(文人)인 왕안석은 신종(神宗)년간에 두 차례 재상을 지냈다. 당시 일부 귀족들이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납세(納稅)를 거부하여, 중앙 정부의 재정이 날로 악화되자, 재상으로 있던 왕안석은 변법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무리들의 반대에 부딪혀 두 차례 모두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왕안석은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널리 제자백가서를 읽고, 각종 이론들을 진지하게 연구함으로써 [형공신학(荊公新學)]을 정립하여 변법의 이론으로 삼았다. 그는 강동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저명한 학자인 주돈이(周敦滯)를 만났다. 그는 주돈이와 여러 가지 사상 문제를 토론하며 밤을 세웠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 문제들을 몇번이고 생각하며, 잠 자는 것, 밤 먹는 것까지도 모두 잊어버렸다(安石退而精思, 至忘寢食).
[廢寢忘食]이란 [잠 못자고 끼니를 거를 정도로 바쁘거나 매우 열심히 공부함]을 비유한 말이다. 학원 수강에다 학교에서의 야간 자율학습 등, 대학을 향한 열기로 고3 학생들은 대부분 잠 못 이루고 끼니 잘(?) 거르는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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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千里(일일천리)
一(한 일) 日(해 일) 千(일천 천) 里(마을 리)
후한서(後漢書) 왕윤(王允)전의 이야기다. 왕윤은 동한(東漢)때의 인물로서, 헌제(獻帝) 재위 시기에 사도(司徒)를 지냈다. 그는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와 동향(同鄕)인 곽림종(郭林宗)은 왕윤의 총명함과 학문하는 태도를 보고, 그를 칭찬하여 [왕윤의 학문은 매우 빨리 발전하고 있는데(王生一日千里), 장차 제왕(帝王)을 보좌하여 대사(大事)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王佐才也).]라고 하였다.
왕윤이 사도로 재임하던 때에, 동탁(董卓)은 전권을 잡고 방탕하고 도리를 모르는 포악한 생활을 하였다. 왕윤은 겉으로는 동탁에게 순종하였지만, 몰래 여포(呂布)를 부추겨 미인계로써 동탁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탁의 부하인 이각(李卉)과 곽사(郭擇)에게 살해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56세. [一日千里]라는 말은 본시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서주(西周)시대 주나라 목왕(穆王)의 휘하에 조보(造父)라는 마부가 있었는데, 그가 모는 말은 하루에 천리길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一日千里]란 본시 말이 매우 빠르게 달리는 것을 뜻하였으나, 지금은 [진보나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름]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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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人捉刀(대인착도)
代(대신할 대) 人(사람 인) 捉(잡을 착) 刀(칼 도)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편의 이야기다. 위(魏)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의 사신이 위 무제를 만나러 왔다. 위 무제는 자신의 키가 작고 풍채가 초라하여 사신들에게 위풍을 보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위무제는 대신(大臣) 최계각(崔季珪)으로 하여금 흉노의 사신을 접견하게 하고, 자신은 칼을 잡고 시위(侍衛)처럼 서있었다(帝自捉刀立牀頭).
최계각은 본시 큰 몸집에 짙은 눈썹과 큰 눈으로 풍채가 당당하고 위엄있었으며, 우렁찬 목소리에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흉노의 접견을 마친 후, 위 무제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흉노의 사신이 위 무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 보게 하였다. 흉노 사신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위왕의 고상한 덕은 대단했습니다만, 칼을 들고 옆자리에 서있던 그 사람은 위풍이 당당하여 정말 영웅같았습니다.]
위 무제는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흉노의 사신을 죽여 버렸다. 위 무제는 다름아닌 조조(曹操)인데, 그는 체구가 작았다고 한다. [代人捉刀]란 [사람을 대신하여 일을 함]을 비유한 말이다. 맹주을 대신하여 칼 들고 비자금 폭로전의 선봉에 나섰던 어떤 협객(?). 그는 꼭 스턴트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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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虎類狗(화호유구)
畵(그릴 화) 虎(범 호) 類(같을 류) 狗(개 구)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기,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은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라는 경박한 조카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계형자엄돈서(誡兄子嚴敦書)>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나 단점을 비난한다거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한다. 나는 사람됨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청렴했던 산도현(山都縣)의 현령 용백고(龍伯高)와 의협심이 강한 월기사마(越騎司馬) 두계량(杜季良)을 존경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그들을 본받기는 바라지 않는다. 용백고처럼 되는지 못한다하더라도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너희들이 두계량을 본받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그리려다 도리어 개를 그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畵虎不成反類狗者也).]
[畵虎類狗]란 [서투른 솜씨로 큰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폭로했던 비자금이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고 있다. 이거야 말로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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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陽酒徒(고양주도)
高(높을 고) 陽(볕 양) 酒(술 주) 徒(무리 도)
사기(史記) 역생육가(?生陸賈)열전의 이야기. 진(秦)나라 말기, 유방(劉邦)은 패현(沛縣)에서 군대를 일으켜 진류(陳留)현의 교외에 주둔하였다. 당시 진류현의 고양이라는 시골에는 역이기(?食其)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일정한 생업을 갖지는 못했다.
역이기는 유방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했는데, 유방이 유생(儒生)들을 싫어하여 그들이 찾아오면 관(冠)을 벗겨서 거기에 오줌을 누고 욕을 퍼붓는다는 말을 듣었다. 역이기는 심사숙고한 후 대책을 마련하여 유방을 만나러 갔다. 유방은 유생이 찾아왔다는 말에 크게 노하여 [유생 따위는 만날 시간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역이기는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고양땅의 술꾼이지 유생이 아니오(吾高陽酒徒. 非儒人也)] 시위의 보고를 받은 유방은 발을 씻다말고, 맨발로 나가 역이기를 맞았다. 그후 역이기는 유방을 도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高陽酒徒]란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리거나, 음주운전하다 '삼진 아웃' 당하는 사람들도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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懸梁刺股(현량자고)
懸(매달 현) 梁(들보 량) 刺(찌를 자) 股(넓적다리 고)
전국책(戰國冊) 진책(秦策)의 이야기. 전국시대의 유명한 인물인 소진(蘇秦). 그는 웅대한 포부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며,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밤이 깊어지고 몸이 지쳐 졸음이 오면 곧 송곳으로 자신의 다리를 찔러 피가 줄줄 흐르곤 하였다(引錐自刺其股, 血流至足). 그는 이렇게 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공부에 임하여, 훗날 전국시대의 유명한 정치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漢)나라 때, 신도(信都)라는 곳에 공부를 매우 좋아하는 손경(孫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하여 밤을 새는 날이 많았다. 그는 튼튼한 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어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以繩系頭, 懸屋梁), 머리를 고정시켰다. 졸다가 머리카락이 뽑힐 듯 아프면 다시 정신을 차려 책을 읽었던 것이다. 훗날 손경은 이러한 호학(好學)정신으로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懸梁刺股]란 [분발하여 책을 읽거나, 고통을 감수하며 공부함]을 비유한 말이다. 독서의 계절. 선선한 밤. 얇지만 깊은 책으로 딱 한 권이라도 읽는다면, 굳이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매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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爭先恐後(쟁선공후)
爭(다툴 쟁) 先(먼저 선) 恐(두려워할 공) 後(뒤 후)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진(晋)나라에는 왕자기(王子期)라는 유명한 마부가 있었다. 조(趙)나라의 대부 양주(襄主)는 왕자기에게서 말 부리는 기술을 배우고, 그와 마차 달리기 시합을 했다. 그러나 양주는 세 번이나 말을 바꾸었지만 모두 지고 말았다. 몹시 불만스런 표정의 양주에게 왕자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을 제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몸과 수레가 일치되어야 하고, 또 부리는 사람과 말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께서는 저를 앞지르고자 초조해 하고, 또 앞서 달릴 때에는 제가 뒤쫓아오지나 않을까 하여 걱정하셨습니다(君後則欲逮臣, 先則恐捷于臣). 대부께서는 앞서든지 뒤서든지간에 내내 저에게 마음을 쓰고 계시니, 어떻게 잘 달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대부께서 저에게 뒤처진 까닭입니다.]
[爭先恐後]란 [격렬한 경쟁의 모습]을 뜻한다. 영어에서도 [The Devil takes the hindmost(악마는 꼴찌를 잡아간다)]라고 했다. 모든 경쟁에서 앞자리만을 다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특히 고3 학생들의 입시 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증가하는 학생 자살도 사실 [爭先恐後]의 결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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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口餘生(호구여생)
虎(범 호) 口(입 구) 餘(남을 여) 生(날 생)
송(宋)나라 때, 호주(湖州)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태(朱泰)라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한 탓에 산에서 나무를 해다 백리 밖에 있는 저자에 내다 팔아 겨우 몇 푼의 돈을 마련하여 생활하였다. 어느 날, 주태가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큰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물고 갔다. 주태는 호랑이게 물려 가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늙으신 어머니는 어찌 할꼬.] 그는 계속 소리치면서 호랑이의 이빨에서 벗어 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를 물고 달리던 호랑이도 이제껏 이런 상황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깜짝 놀라서, 입을 벌려 주태를 놓아 주고는, 오히려 허둥지둥 도망치고 말았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주태가 부상당한 채 집으로 돌아 오자,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그를 위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돈과 물건을 가지고 와서 그를 도와 주었다. 호구(虎口)에서 살아 돌아온 주태는 그후 주호잔(朱虎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虎口餘生(life spared from the mouth of a tiger)]이란 [큰 위험에서 목숨을 구함]을 비유한 말이다.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던 대성동 주민들을 돌아왔다. 이는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살아서 돌아 온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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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鼎烹鷄(우정팽계)
牛(소 우) 鼎(솥 정) 烹(삶을 팽) 鷄(닭 계)
후한서(後漢書) 변양전(邊讓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말기, 진류(陳留)지방에 재능과 학문을 겸비한 변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정의 의랑(議郞)인 채옹(蔡邕)은 하진(何進)의 수하에 있던 변양에게 더 높은 관직을 맡기고자 하여, 하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양은 뛰어난 인물로서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고, 법도(法度)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소 삶는 큰 솥에 닭 한 마리를 삶게 되면 물이 너무 많아 맛이 없어서 먹지 못하게 되고(函牛之鼎以烹鷄 多汗則淡而不可食), 물을 너무 조금 부으면 익지 않아 먹을 수 없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큰 인재를 하찮은 일에 쓴다는 뜻이니, 장군께서는 그로 하여금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진은 채옹의 말을 듣고, 변양을 더 높은 관직에 천거하였다. [牛鼎烹鷄]란 [큰 인재를 작은 일에 씀]을 비유한 말이다. 소와 닭은 한자에서 각각 최고와 최저를 상징하는 동물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요즘 보약으로 기른 100만원 짜리 닭이 날개 돋친듯 팔리고 있다 한다. 이런 닭 정도라면 소 삶는 큰 솥이라야 격에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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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林春滿(행림춘만)
杏(살구나무 행) 林(수풀 림) 春(봄 춘) 滿(찰 만)
진(晋)나라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동봉(董奉)편의 이야기다. 삼국(三國)시대, 오(吳)나라에 동봉이라는 명의(名醫)가 있었다. 그의 집은 진찰 받으러 온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붐볐으나, 그는 다른 의사들과는 달리 환자들로부터 치료비를 받지 않고, 완치된 후에는 몇 그루의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다. 중병이었던 사람은 다섯 그루, 병이 가벼웠던 사람은 한 그루를 심게 하였다. 몇 년후, 그의 집은 수십만 그루의 살구나무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그 살구나무 숲을 [동선행림(董仙杏林)]이라 했다.
살구가 익을 때면 사람들이 살구를 사러 왔지만, 동봉은 한 그릇의 쌀과 한 그릇의 살구를 맞바꾸었다. 때로 반 그릇의 쌀을 놓고 한 그릇의 살구를 슬쩍 따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럴 때면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이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후에는 아무도 양심을 속이려 들지 않았다. 동봉은 이렇게 하여 모아진 쌀로 가난한 이들을 도왔으며, 어느 날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杏林春滿]이란 [의술이 고명(高明)함]을 비유한 말이다. 최근 명의(名醫)들의 특진 한 번 받으려면 4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고명한 의술 때문인지 아니면 환자들의 고급(?)병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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擧案齊眉(거안제미)
擧(들 거) 案(책상 안) 齊(가지런할 제) 眉(눈썹 미)
후한서(後漢書) 양홍전(梁鴻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대, 양홍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태학(太學)을 마쳐 많은 학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들에서 돼지를 기르며 살았다. 그런데 맹(孟)씨라는 사람의 집에 다 자란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뚱뚱한 몸매에 시커먼 얼굴, 게다가 힘은 장사였다. 그녀의 부모가 그녀에게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양홍처럼 덕 있는 사람이라면 시집을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양홍은 몹시 기뻐하며,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양홍 부부는 산에 은거하면서 쌀을 찧어 주는 일로 생활을 하였다. 양홍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의 아내는 감히 남편을 쳐다보지 못하고 밥상을 눈 높이까지 들고 왔다(不敢于鴻前仰視, 擧案齊眉).
[擧案齊眉]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함]을 비유한 말이다. 간간히 들려오는 매 맞는 남편과 아내들의 씁쓸한 소식, 그리고 남매간인지 부녀간인지 분간 못 할 젊은 부부들의 사랑(?)의 호칭. 이것들은 모두 부부가 진정 서로 존경함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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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獸食人(솔수식인)
率(거느릴솔) 獸(짐승 수) 食(먹을 식) 人(사람 인)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편의 이야기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맹자는 그에게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는 것이 칼로 죽이는 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양혜왕은 다름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라는 맹자의 물음에 양혜왕이 다른 점이 없다고 하자, 맹자는 말을 계속하였다.
[주방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이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도 사람들은 미워하는데, 백성의 부모가 되어 가지고 정치를 해나가는데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면(不免於率獸而食人) 백성의 부모노릇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率獸食人]이란 [폭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얼마전 북한의 김정일이 주석직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당장 먹을 식량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쩍 마른 인민들의 살찐 어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백성들을 잡아 먹는 것뿐 이리라.
157
分道揚祛(분도양표)
分(나눌 분) 道(길 도) 揚(오를 양) 祛(재갈 표)
북사(北史) 하간공제전(河間公齊傳)의 이야기. 남북조의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다스리던 시기, 원지(元志)라는 사람이 도읍인 낙양의 경조윤(京兆尹)을 맡고 있었다. 원지는 뛰어난 문재(文才)와 능숙한 일처리, 그리고 황제의 목숨을 구했던 그의 부친 덕분에, 효문제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조정 관리들을 무시하였다.
한번은, 원지가 수레를 타고 길을 가다가 우연히 조정의 어사중위(御史中尉)인 이표(李彪)를 만나게 되었다. 원지는 관직으로 보아 마땅히 이표에게 길을 양보하여야 했으나, 오히려 그를 얕보고 길을 내주지 않았다. 두 사람는 하는 수 없이 이 일을 효문제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였다. 난처해진 효문제는 그들의 시비에 말리고 싶지 않아서 [낙양은 과인의 도읍이니, 마땅히 길을 나누어서 수레를 몰아야 하오(應分路揚祛). 이제부터 길을 달리하여 다니도록 하시오.]라고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分道揚祛]란 [취향이나 목표 등에 따라 각각 다른 길을 감]을 뜻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신한국당의 분란(紛亂). 역시 취향이 다른 구성원들의 갈길은 이것뿐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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犬牙相錯(견아상착)
犬(개 견) 牙(어금니 아) 相(서로 상) 錯(섞일 착)
한서(漢書) 중산정왕전(中山靖王傳)의 이야기.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건국 후, 각지의 이성(異姓) 제후(諸侯)들을 제거하고 같은 성씨(姓氏)의 인물들을 왕후로 봉하였다. 그러나 3번째 군주인 경제(景帝) 때에는 각 지역의 동성 제후들이 증대된 세력을 믿고 조정에 대항하며 제위를 다투었다.
오왕(吳王) 유비(劉?)의 반란이 평정된 후, 경제는 다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봉하였다. 한무제가 제위를 계승한 후, 조정 대신들은 이러한 왕후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하며, 그들을 제거하도록 무제에게 건의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왕후들은 크게 노하여 [우리는 모두 황실의 골육지친으로서 선왕께서 땅을 주시어 마치 개의 이빨처럼 서로 얽혀있으며(犬牙相交錯), 서로 도와 도읍을 지키며 종실을 반석처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를 무고하다니, 이는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들 중 중산정왕은 무제의 앞에서 대성통곡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한무제는 그들을 위로하면서도, 비밀리에 중앙집권 통치를 강화하였다. [犬牙相錯]이란 [많은 요인들이 얽혀 상황이 복잡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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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株待兎(수주대토)
守(지킬 수) 株(그루 주) 待(기다릴 대) 兎(토끼 토)
한비자(韓非子) 오두(五履)편의 이야기다. 춘추시기,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는데,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급히 달려 오더니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는게 아닌가. 이 농부는 토끼를 거저 줍게 되자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날 이후, 농부는 쟁기를 풀어 놓고 하루종일 나무 그루터기 옆에서 다시 토끼가 달려와 나무에 부딪혀 죽기만을 기다렸다(因釋其?而守株, 冀復得?). 하지만 몇날이 지나도록 나무에 부딪혀 죽는 토끼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가 농사를 지었던 땅은 황폐해졌고, 나라 안의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株]란 본시 [나무의 그루터기]를 뜻하지만, 지금은 증권시장의 핵심이 되었다. 홍콩, 동경, 뉴욕 할 것 없이 전세계의 주가(株價)가 폭락하고 있다. 나무와 기업의 밑둥인 [株(?)]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국이라면 횡재를 꿈꾸었던 일부 투자가들은 토끼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그저 [수주(守株)]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守株待兎(trust to chance and windfalls)]란 [변통을 모르거나 노력없이 요행만을 기대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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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分五裂(사분오열)
四(넉 사) 分(나눌 분) 五(다섯 오) 裂(찢을 열)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의 이야기. 전국시대,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조(趙) 위(衛) 진(秦) 등 7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절. 진나라는 상앙(商椽)의 변법(變法)을 시행하여 국력이 증강되자 천하를 통일하고자 빈번히 주변 나라들을 침공하였다. 이에 6국은 소진(蘇秦)의 합종책(合縱策)으로 진나라의 계획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진나라는 장의(張儀)의 연횡책(連橫策)을 채용하고 그를 재상(宰相)으로 임명하여 6국을 돌며 유세하도록 하였다. 장의는 먼저 위(魏)나라 왕을 설득하였다.
[위나라는 남으로 초나라에, 동으로는 제나라, 서쪽으로는 한(韓)나라, 북으로는 조나라와 접해 있습니다. 만약 주위의 나라들과 관계가 나빠져서 그들이 공격해 온다면 사방을 방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며, 위나라는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사분오열될 것이니, 차리리 진나라에 의지하여 보장받는게 나을 것입니다.]
장의는 6국에서 이해와 유혹, 협박 등으로 그들의 합종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다. [四分五裂]이란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짐]을 뜻한다. 신한국당의 한 의원이 탈당하였다. 드디어 사분오열의 막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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予取先與(여취선여)
予(나 여) 取(취할 취) 先(먼저 선) 與(줄 여)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의 이야기. 진(晋)나라에 지백(知伯)이라는 귀족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귀족인 위환자(魏桓子)에게 영토를 강요하였다. 위환자는 후에 위나라의 선조(先祖)가 된 사람인데, 그도 당시에 다른 사람들의 영토를 차지하려 하였으므로, 지백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이에 임장(任章)이라는 사람이 위환자에게 지백의 요구대로 땅을 떼어 주도록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백에게 땅을 떼어준다면, 지백은 자신을 대단한 인물이라고 자만하여 적을 얕보게 될 것입니다. 이웃 나라들도 이러한 피해를 입게 될까봐 단결하여 공동으로 지백을 상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백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주서(周書)에서는 {상대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그를 키워주고,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에게 미리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將欲取之, 必故予之)}라고 했습니다.]
위환자는 임장의 말대로 하였다. 지백은 과연 교만과 횡포, 그리고 탐욕 때문에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불렀다. [予取先與]란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함]을 뜻하며, 사회생활의 많은 경우에 적용되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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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立鷄塋(학립계군)
鶴(학 학) 立(설 립) 鷄(닭 계) 塋(무리 군)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편의 이야기다. 서진(西晉) 초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혜강(?康)의 아들 혜연조(?延祖)는 인물이 준수하고 차림이 의젓하였다. 그가 진나라 혜제(惠帝)인 마충(馬衷)의 시중(侍中)으로 있을 때, 도성(都城)에 변란이 발생하였다. 당시 혜연조는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궁으로 달려갔다. 궁문을 지키던 시위(侍衛)가 그를 향해 활을 쏘려고 하였다. 그때 시위관은 혜연조의 늠름하고 준수한 모습을 보고 활을 거두라고 명령하였다.
혜강의 친구이자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서 사도(司徒)의 직을 지냈던 왕융(王戎)은 사태가 수습된 뒤에 한 부하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날 혼란스러운 사람들 속에서, 혜연조의 크고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들의 무리속에 서 있는 학처럼 위풍이 있어서,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갖게 하였습니다(?延祖卓卓如野鶴之在鷄塋).]
[鶴立鷄塋]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도 하며, [재능이나 풍채가 출중한 인물]을 비유한 말이다. 정신없는 정치판과 경제판을 장악할 인물이 나타난다면, 바로 그는 한 마리의 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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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中敵國(주중적국)
舟(배 주) 中(가운데 중) 敵(원수 적) 國(나라 국)
사기(史記) 손자오기(孫子吳起)열전의 이야기.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 장군인 오기(吳起)는 문후가 죽자 그의 아들인 무후(武侯)를 계속 섬기게 되었다. 어느 날, 무후가 서하(西河)에 배를 타고 가다 중간쯤에 이르자 뒤를 돌아보며 오기에게 [이 산과 강의 험난한 조망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위나라의 보배로다.]라고 했다.
그러자 오기는 이처럼 대답하였다. [국가의 보배가 되는 것은 임금의 덕일뿐, 지형의 험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옛날 삼묘씨의 나라는 동정호(洞庭湖)의 왼쪽을 끼고 팽려호(彭?湖)를 오른쪽으로 끼고 있었으나, 임금이 덕의(德義)를 닦지 않아기 때문에 우왕(禹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임금의 덕에 있지 지형의 험난 함에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우리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의 사람들도 모두 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舟中之人盡爲敵國也).]
[舟中敵國]이란 [친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이탈함]을 비유한 말이다. 대통령과 총재의 대립, 그리고 의원들의 잇따른 탈당으로 좌초된 신한국호. 이제는 배 안에 적들이 가득한 유령선(?)으로 변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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竭澤而漁(갈택이어)
竭(다할 갈) 澤(못 택) 而(말 이을 이) 漁(고기 잡을 어)
여씨춘추(呂氏春秋) 의상(義賞)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진(晋)나라 문공(文公)은 기원전 632년, 성복(城?)이라는 곳에서 초(楚)나라 군대와 격전을 벌였다. 당시 진나라는 병력이 열세였으므로, 진문공은 부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호언(狐偃)이라는 자가 속임수를 써보자는 의견을 냈다.
진문공은 호언의 계책을 옹계(雍季)에게 알려주며, 그의 견해를 물었다. 옹계도 하는 수없이 동의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연못의 물을 말려서 고기를 잡고, 숲을 태워서 사냥을 한다면 못잡을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듬해에는 잡을 고기나 짐승이 없게 될 것입니다. 속이는 계책도 이러합니다. 비록 어쩌다 한번은 성공할 지 모르지만, 다음 번에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먼 앞날을 내다보는 계책이 아닙니다.]
내신 성적에 집착한 나머지 시험 문제 유출과 집단 부정행위 등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일선 학교나 학생들의 책임도 있지만, 2-3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교육 정책의 책임이 더 크다. 인성교육을 외치면서도, 사실은 [막고 품으면(?)] 올라가는 점수에 더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竭澤而漁]란 [멀리 내다 보지 못하고 눈 앞의 이익만을 꾀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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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枕黃粱(일침황량)
一(한 일) 枕(베개 침) 黃(누를 황) 粱(기장 량)
당(唐)나라 심기제(沈旣濟)가 쓴 침중기(枕中記)에 나오는 이야기. 옛날 노생(盧生)이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단(邯鄲)의 여관에서 만난 여옹(呂翁)이라는 도사에게 고단한 처지를 이야기했다. 도사는 그에게 베개 하나를 꺼내주면서 그걸 베고 자보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여관 주인은 기장을 삶고 있었다. 노생은 잠이 들자 곧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노생은 부잣집의 아름다운 딸과 결혼하여, 재상(宰相)이 되었다가, 다시 조국공(趙國公)에 봉하여졌다. 노생은 여든이 넘도록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꿈에서 깨어난 노생은 여관 주인이 아직도 기장을 삶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곁에서 이를 보고 있던 도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인생이란 본시 이런 것이오.]라고 말했다.
취업과 수능을 앞두고 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장원급제 셔츠에 도깨비나 부적이 그려진 팬티, 족집게 점쟁이, 사주관상 등등.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노력이지, 부질없는 짓에 혼(?)을 뺄 일이 아니다. [一枕黃粱]이란 [황량일몽(黃粱一夢)]이고도 한다. 이는 본시 [부귀의 무상함]을 뜻하지만, 지금은 [환상적이고 허황된 일]을 비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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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逐鹿(중원축록)
中(가운데 중) 原(근원 원) 逐(쫓을 축) 鹿(사슴 록)
한서(漢書) 괴오강식부(?伍江息夫)전과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의 이야기. 한나라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의 도움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게 되자, 한신을 제왕(齊王)으로 봉하였다. 당시 한신의 모사(謀士)로 있던 괴통(?通)은 한신에게 제위(帝位)를 차지하도록 종용하였다.
훗날, 모반죄로 처형되기 전, 한신은 [내가 괴통의 말을 듣지 않아 오늘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도다.]라며 탄식하였다. 이 말에 유방은 즉시 괴통을 붙잡아 사형에 처하려 했다. 괴통은 일이 이미 이렇게 된 것을 보고 침착하게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따르는 법입니다. 당시 저는 한신만을 알았지, 폐하를 알지 못했습니다. 진나라가 중원에서 사슴을 놓치자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를 잡으려 하였는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먼저 천하를 차지하였던 것입니다(秦失其鹿, 天下共逐之. 高材者先得). 폐하와 다투던 자들이 모두 실패한 이 마당에 어찌 한신을 두려워 하십니까?]
이합집산이 진행중인 정치권. 각종 비밀병기로 무장한 각 문파(門派)의 고수(?)들이 한 마리의 사슴을 놓고 중원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렇듯 [中原逐鹿]이란 [치열한 정권 쟁탈]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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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飢己溺(기기기익)
己(자기 기) 飢(굶주릴 기) 溺(물에 빠질 닉)
먼 옛날 대홍수(大洪水)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요(堯)임금은 곤(噓)에게 치수(治水)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아무런 결과가 없자, 요임금을 이어 즉위한 순(舜)은 곤의 아들인 우(禹)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우는 13년후 치수에 성공하였다. 또한 직(稷)이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농업을 좋아하여 항상 곡식의 종자를 모아 땅에 심었다. 후에는 간단한 농기구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농경지식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전국(戰國)시대, 맹자(孟子)는 우와 직을 칭송하여 [우는 천하의 사람들이 물속에 빠진 것을 자기가 치수(治水)를 잘못하여 그들을 빠지게 한 것이라 생각하였고, 직은 천하의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고통을 받게 되면 자신이 일을 잘못하여 그들을 굶주리게 한 것이라 생각하였다(禹思天下有溺者, 由己溺之也. 稷思天下有餓者, 由己餓之也)]라고 말했다. 이는 맹자(孟子) 이루상(離樓上)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己飢己溺]은 [인익기익(人溺己溺)] [인기기기(人飢己飢)]라고도 하며, 지금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책임을 다함]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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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心病狂(상심병광)
喪(죽을 상) 心(마음 심) 病(병 병) 狂(미칠 광)
송사(宋史) 범여규(范如圭)전의 이야기. 송나라 때, 비서성(秘書省)의 관리인 범여규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금(金)나라의 남침에 사람들은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대신(大臣) 진회(秦檜)는 투항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금나라의 사신(使臣)이 송나라에 오게 되었는데, 그들을 묵게 할 적당한 장소가 없어서 진회는 그들을 비서성에 묵게 하려고 했다.
범여규는 이 사실을 알고 극력 반대하였다. 범여규는 재상인 조정(趙鼎)에게 [기밀상 중요한 비서성에 어떻게 적국의 사신들을 묵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송나라에 도착한 금나라 사신들은 그 언행이 오만하여 송나라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범여규는 진회에게 글을 써서 그의 편견과 굴욕적 행동을 비난하였다. [이성을 잃고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일할 수 있겠소(公不喪心病狂, 奈何爲此)?]라며.
[喪心病狂]이란 [이성을 잃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독도의 접안 시설이 완공되자 일본 관리들이 다시 망언을 하였다. 남의 집수리에 자기네가 신경 쓸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독도에 망언치료전문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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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頭著糞(불두저분)
佛(부처 불) 頭(머리 두) 著(붙을 저) 糞(똥 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여회선사(如會禪師)편의 이야기. 송(宋)나라 때, 최(崔)씨 성을 가진 한 사나이가 하루는 절에 갔다가, 참새들이 불상의 머리에 똥 싸놓은 것를 보게 되었다(鳥雀于佛頭上放糞). 그는 절의 주지가 너무 나태하다는 생각이 들어 크게 화를 내며 주지에게 말했다.
[이런 참새들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소?] 주지는 이 사람의 의도를 잘 알고 대답했다. [물론 있지요.] 최씨 사나이는 주지의 이런 대답을 듣고, 그가 어떤 식으로 변명할 것인지 궁금하여 다시 질문을 하였다. [참새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요? 참새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떻게 부처의 머리에 똥을 쌀 수 있겠소?] 주지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참새가 불상에 똥을 싼 것은 바로 부처가 자비하여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새들이 독수리의 머리에 가서 똥을 싸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사나이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佛頭著糞]이란 [경멸이나 모욕을 당함]을 비유한 말이다. 비방과 폭로가 난무하는 대선 정국. 머리에 새똥 맞은(?) 사람들이 많다. 특히 신당지원설로 내쫓기듯 탈당한 대통령의 머리에는 엄청난 양이 쏟아졌다.
170
管廷呑棗(홀륜탄조)
管(온전할 홀) 廷(완전할 륜) 呑(삼킬 탄) 棗(대추 조)
주자어류(朱子語類) 논어(論語) 16편에는 [도리란 조리가 분명한 일이지 뭉뚱그린 것이 아니다(不是管廷一物)]라는 말이 있다.
옛날, 한 의원이 사람들에게 [배를 생으로 먹으면 치아에는 좋지만 비장(脾臟)에는 좋지 않고, 반대로 대추는 비장에는 좋지만 치아에 해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총명하다는 한 사나이가 이 말을 듣고, 의원에게 말을 하였다. [저에게 배와 대추의 좋은 점만을 취하고, 그것들의 나쁜 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의원은 이제껏 이런 방법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호기심에 찬 말투로 그 사나이에게 물었다. 그 사나이의 대답은 이러했다. [배를 먹을 때는 씹기만 하고 삼키지는 않으며, 대추를 먹을 때는 씹지 않고 통째로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管廷呑棗]란 [꼼꼼하게 이해하지 않고 뭉뚱그려 넘어감]을 비유한 말이다. TV토론회에 나온 대선 후보들. 어려운 질문은 대추를 통째로 삼키듯 답변했다. 문제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 자질이다. 통째로 삼키려다 목에 걸리면 대통령이고 뭐고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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羊頭狗肉(양두구육)
羊(양 양) 頭(머리 두) 狗(개 구) 肉(고기 육)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內篇)의 이야기. 춘추시대, 제(齊)나라 경공(景公)은 어리석고 무능한 국왕이었다. 그는 궁안의 여자들로 하여금 남장(男裝)을 하게 하고, 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궁궐 밖의 여자들도 이 소문을 듣고 남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경공은 이 사실을 알고 관리를 보내 이러한 유행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승상(丞相)인 안영(晏?)에게 그 까닭을 묻자, 안영은 이처럼 대답하였다. [궁안에서는 여자들에게 남장을 시키면서 궁밖에서는 이를 금지시키시는데, 이는 마치 문에다 소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猶懸牛首于門而賣馬肉于內也). 만약 왕께서 궁안의 남장을 금지시키신다면, 궁밖의 여자들도 남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시 소머리와 말고기였던 것이 후에는 양머리(羊頭)와 개고기(狗肉)로 바뀌었다. [羊頭狗肉]이란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며, 영어로는 [Cry up wine and sell vinegar(포도주 대신 식초 팔기)]라고 한다. 가짜 한우고기와 가짜 양주 판매업자, 그리고 풀려난 권력형 비리관련자들. 이들은 모두 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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怒髮衝冠(노발충관)
怒(성낼 노) 髮(터럭 발) 衝(찌를 충) 冠(갓 관)
사기(史記) 염파인상여(廉頗藺相如)열전의 이야기.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유명한 보물인 화씨벽(和氏璧)이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수중에 있다는 말을 듣었다. 소양왕은 화씨벽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혜문왕에게 진나라의 15성(城)과 바꾸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혜문왕은 화씨벽을 주더라도 15성을 얻지 못한채 속을 것만 같고, 그렇다고 주지 않으면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혜문왕은 인상여를 사신으로 임명하여 진나라에 보냈다.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온 인상여는 소양왕이 15성과 화씨벽을 교환하려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소양왕을 속여 다시 화씨벽을 돌려 받았다. 인상여는 화씨벽을 손에 넣자마자 궁전의 기둥에다 깨뜨려버릴 기세로 나섰다.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의 머리털은 관을 밀어 올릴 정도였다(怒髮上衝冠). 이렇듯 [怒髮衝冠]이란 [분노가 극에 달함]을 묘사한 말이다.
특정 후보 지원설 등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노발대발하였다. 폭로 당사자들을 고발하는 한편, 대통령은 신한국당은 탈당하였다. 정말 열(?)을 받긴 받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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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雨同舟(풍우동주)
風(바람 풍) 雨(비 우) 同(같을 동) 舟(배 주)
손자(孫子) 구지(九地)편에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서로 미워하나, 배를 같이 타고 가다가 바람을 만나면 서로 구함이 좌우의 손과 같다(當其同舟而濟, 遇風, 其相救也)]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중국의 남쪽에 오(吳)와 월(越)이라는 두 개의 제후국이 있었다. 두 나라는 영토가 인접하고 산수(山水)가 서로 이어져 있었지만, 항상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양국 백성들은 서로 원수 대하듯 하였다.
이러한 양국 관계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마주 치기라도 하면 가볍게는 말다툼이나 욕지거리, 심하게는 사생 결단의 싸움을 하였다. 그런데, 두 나라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타게 되었는데, 마침 폭풍우가 몰아쳤다. 두 나라 사람들은 협심합력하여 난관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서로 욕하거나 싸우지 않고, 마치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도왔던 것이다.
[風雨同舟]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고도 한다. 이는 원수같은 사람들이 [공동의 난관을 만나 어쩔 수 없이 합심함]을 비유한 말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정치권. 급한 김에 합당(合黨)이라는 조각배에 올라 탓지만, 풍랑이 가라앉은 다음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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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桃啖君(여도담군)
餘(남을 여) 桃(복숭아 도) 啖(먹을 담) 君(임금 군)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총애를 받던 미자하(彌子瑕)는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몰래 국왕 전용 수레를 타고 황궁을 빠져 나왔다. 당시 위나라의 법에는 함부로 국왕의 수레를 탄 사람은 발목을 자르는 월형(?刑)에 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지극한 효성이라며 칭찬하였다.
그 후, 어느 날 미자하는 국왕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다가, 먹다만 복숭아 반쪽을 국왕에게 건넸다. 국왕은 반쪽 복숭아를 먹으면서도 [나를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이 맛을 참고 나에게 먹도록 해주다니.]라고 칭찬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국왕은 미자하의 모든 행동이 눈에 거슬리기만 하였다. 그러던 중, 미자하가 죄를 범하게 되자, 국왕은 그녀를 꾸짖었다.
[이 천한 것아!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지난 날 국왕의 명이라면서 과인의 수레를 훔쳐타고, 또 먹다 남은 복숭아를 감히 나에게 먹이다니. ]
[餘桃啖君]이란 [사랑과 미움, 기쁨과 분노가 늘 변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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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牛喘月(오우천월)
吳(오나라 오) 牛(소 우) 喘(헐떡거릴 천) 月(달 월)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편의 이야기. 서진(西晉) 초, 진나라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상서령(尙書令)으로 만분(滿奮)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만분이 진무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 진무제는 그에게 북쪽 창 옆에 앉도록 하였다. 그 쪽 창문에는 종이 대신 투명한 유리 병풍이 놓여 있었다. 바람을 두려워하는 만분은 이를 자세히 보지 못하고, 그 창가에 앉기를 꺼려했다. 진무제가 이를 보고 웃자, 만분은 얼른 창 가에 가서 앉으며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남쪽 오(吳)나라의 물소들은 더위를 매우 싫어하여, 여름이 되면 물속에 들어가 놀거나 나무 그늘에서 쉬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입니다. 어쩌다 밤에 밝은 달을 보게 되면 그것이 태양인줄 알고 곧 숨을 헐떡이게 됩니다. 저도 오나라의 소가 달 보고 숨을 헐떡이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臣猶吳牛, 見月而喘).]
[吳牛喘月]이란 [지레짐작으로 공연한 일에 겁을 내고 걱정함]을 비유한 말이다. 요즘 걱정스런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하지만 지나친 걱정은 건강의 적(敵). 희망을 갖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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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穎而出(탈영이출)
脫(벗을 탈) 穎(이삭 영) 而(말 이을 이) 出(날 출)
사기(史記) 평원군우경(平原君虞卿)열전의 이야기. 전국시기,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 모수(毛遂)는 3년여를 묵으면서, 이제껏 어떠한 재능을 발휘해 본적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기원전 257년, 진(秦)나라의 공격으로 조(趙)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평원군은 효왕(孝王)의 명으로 초(楚)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가게 되었다.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모수가 나서서, 초나라까지 수행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모수는 [군께서 저에게 좀더 일찍 기회를 주셨더라면, 저의 모든 재능이 일찍 드러났을 것입니다(乃穎脫而出).]라고 했다.
이에 평원군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초나라로 떠났다. 평원군은 초왕과의 협상에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때, 모수가 한 손에는 칼을 뽑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초왕의 옷깃을 잡은채, 초왕을 설복시켜 동의를 얻어 내게 되었다.
[脫穎而出]이란 [모든 재능이 완전하게 드러남]을 비유한 말이다. 오늘 80여만명의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치르게 된다. 그들의 재능과 실력이 충분히 발휘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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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酸不末(주산불수)
酒(술 주) 酸(실 산) 不(아닐 불) 末(팔 수)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우상(外儲說右上)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송(宋)나라에 술을 만들어 파는 장씨(莊氏)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되를 속이지도 않고 손님에게도 매우 친절했으며, 술 빚는 솜씨 또한 훌륭했다. 뿐만 아니라 술집임을 알리는 깃발까지 높이 세워 두었다. 그러나 술이 팔리지 않아서 언제나 쉬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장씨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양천(楊?)이라는 유식한 노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노인의 답은 이러했다. [바로 당신 집의 개가 너무 사납기 때문이오.] 장씨는 술장사와 개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양천이라는 노인은 다시 설명하였다. [사나운 개가 술 사러 오는 사람들을 보고 짖어대고, 특히 아이들이 술 심부름을 왔다가 놀라 달아나는 판인데, 누가 감히 술을 사러 오겠소? 그러니 술이 시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오.]
[酒酸不末]란 [경영 방법이 좋지 않거나 일처리가 잘못 되었음]을 비유한 말이다. 금융시장과 정치권에서 술 썩은 냄새가 난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나서서 책임지려는 이는 아무도 없다. 술장사는 술을 생각해서라도 당장 개를 없애고 손님을 맞아야 하는 법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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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枘圓鑿(방예원조)
方(모 방) 枘(자루 예) 圓(둥글 원) 鑿(구멍 조)
전국시기, 진(秦)나라는 장의(張儀)의 [연횡책]을 채용하여 소진(蘇秦)의 [합종책]으로 대항하는 6국을 상대하였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진나라는 빈번하게 6국을 침범하고 남쪽 대국인 초(楚)나라에 위협을 가하였다.
초나라 회왕(懷王) 때, 굴원(屈原)은 동쪽의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의 공격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초회왕의 어린 자식과 총희 등이 방해하였다. 결국 굴원은 관직마저 박탈당한 채 멀리 유배당하게 되었다.
굴원의 제자인 송옥(宋玉)은 스승에게 닥친 이러한 일에 대해 비분(悲憤)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송옥은 자신의 억울한 마음을 [구변(九辯)]이라는 시로 그려냈는데, 이 시 중에는 [둥근 구멍에 네모난 자루(圓鑿而方?兮)]라는 대목이 있다. 이 표현은 굴원의 원대한 정치적 이상이 간신배들의 어두운 눈과 달라서 서로 맞지 않음을 읊은 것이다.
[方枘圓鑿] 또는 [圓鑿方?]는 [양자가 서로 어울리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막판 세 불리기에 열중인 각 당(黨). 질(質)보다 양(量)에 치중한 탓인지, 둥근 사람을 네모난 곳에 앉히고, 네모난 사람을 둥근 자리에 쑤셔 넣으려고들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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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面桃花(인면도화)
人(사람 인) 面(낯 면) 桃(복숭아 도) 花(꽃 화)
당(唐) 맹계(孟棨)의 [정감(情感)]이라는 시에 얽힌 이야기. 당나라 때, 최호(崔護)라는 매우 잘 생긴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해 청명(淸明)이던 날, 그는 혼자서 장안(長安)을 여행하다 성(城)의 남쪽에 이르렀다.
그는 복숭아 꽃이 만발한 곳에 집 한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을 얻어 마시기 위해 대문을 두드렸다. 한 여인이 나와서 그에게 물 한 잔을 주었다. 꽃이 만발한 복숭아나무 아래에 선 여인은 마치 복숭아꽃 같았다. 최호와 그 여인은 상대의 뛰어난 모습과 아름다운 자태에 서로 반하였다.
이듬해 같은 날, 최호는 다시 그 곳에 가서 그 여인을 찾았다. 집과 담은 옛모습 그대로였지만, 문은 이미 굳게 잠긴채 사람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에 최호는 시 한 수를 지어 사모하는 마음을 달랬으니...
[지난해 오늘 이 문안엔, 고운 얼굴 복숭화꽃 서로 붉게 비추었지(人面桃花相暎紅). 고운 그 얼굴은 어디 가고, 복숭아꽃만 봄바람에 웃고 있네.]
[人面桃花]란 [한눈에 반한 뒤, 다시 만나지 못해 그리워하는 여인]을 비유한 말이다. 추워지는 날씨, 그리고 마지막 가는 가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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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憂外患(내우외환)
內(안 내) 憂(근심할 우) 外(밖 외) 患(근심 환)
관자(管子) 계(戒)편의 이야기.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음식을 들지도 않으며 외전(外殿)에서 지내고 있었다. 궁녀들을 관장하는 여관(女官)이 궁녀들에게 임금이 곧 거동하실거라며 외전에 나가서 임금을 모시도록 지시하였다. 궁녀들이 모시겠다고 몰려오자, 환공은 화를 내며 [내가 곧 거동하리라는 소리를 누가 하더냐?]라고 물었다.
궁녀들의 말을 들은 환공이 곧 여관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여관의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임금께서 내우(內憂)가 있거나 외환(外患)이 있으면 외전에서 주무시고 음식을 들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임금께서 외전에서 지내시는 것은 다른 내우는 없으나, 필시 외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非有內憂, 必有外患). 그래서 저는 임금께서 곧 거동하시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낸 여관에게 환공은 감동하였다. [內憂外患]이란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어렵고 걱정스러운 사태]를 뜻한다. 안으로는 표류하는 국정(國政), 밖으로는 치솟는 달러화. 바로 [외환(外換)]이 [외환(外患)]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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功虧一簣(공휴일궤)
功(공 공) 虧(이지러질 휴) 一(한 일) 簣(삼태기 궤)
상서(尙書) 주서(周書)의 여오(旅獒)에 나오는 기록이다. 주(周)나라가 상(商)나라를 물리치자, 서쪽에 살던 여족(旅族)들이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獒(오)]라는 큰 개를 공물로 바쳐왔다. 이때 태보(太保)였던 소공(召公)은 [여오(旅獒)]라는 글을 지었다. 그는 이 글에서 오랑캐들이 바친 개 같은 공물은 임금의 위신과 관련이 있으므로 받지 말기를 충고했다.
[개나 말은 그 풍토에 맞지 않으면 기르지 마십시오. 새벽부터 밤까지 조금도 부지런하지 않음이 있게 하지 마십시오. 자질구레한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결국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니, 아홉 길 높이의 산을 쌓음에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면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爲山九?, 功虧一?). 진정 이렇게 하신다면 백성들은 사는 곳을 보전할 수 있고, 당신은 대대로 임금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功虧一簣]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실패함]을 비유한 말이다. 세계화의 구호 아래 국민 소득 1만불을 환호하던 때가 엊그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폭등하는 환율 덕분에 늘어나도 시원찮을 소득이 매일 줄어들고 있다. 국민소득 2만불과 선진국을 향한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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債臺高築(채대고축)
債(빚 채) 臺(돈대 대) 高(높을 고) 築(쌓을 축)
한서(漢書) 제후왕표서(諸侯王表序)의 이야기. 전국시대, 주(周)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난왕(周?王)은 나약하고 무능한 사람이었다. 명목상 군주의 자리에 있었지만 각 제후들은 그의 통치에 따르지 않았다. 그들 중 진(秦)나라는 국력이 강해지자 자주 다른 나라를 침공하였으며, 초(楚)나라 효열왕(孝烈王)은 각국과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는 주나라의 난왕에게 진나라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주난왕은 전쟁이 끝나면 이자까지 갚겠다고 설득하며 부호(富豪)들에게서 돈을 빌려 출전(出戰)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되자, 돈을 빌려줬던 부호들이 궁으로 몰려와 난왕에게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다. 소란스런 소리가 궁궐 깊은 곳까지 들려왔다. 주난왕은 빚쟁이들을 피해, 하루종일 궁안의 높은 누대에 숨어서 근심과 두려움으로 지냈다(有逃債之臺).
[債臺高築]이란 [빚이 너무 많아 갚을 방법이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외채(外債)도 채 갚지 못한 판국에 다시 IMF의 급전(急錢)을 꾸어 쓰게 되었다. 빚쟁이한테 쫓겨 골방으로 몰리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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傾箱倒篋(경상도협)
傾(기울 경) 箱(상자 상) 倒(넘어질 도) 篋(상자 협)
세설신어(世說新語) 현원(賢媛)편의 이야기. 진(晋)나라 때, 태위(太尉)인 치감(?鑑)은 자신의 딸을 매우 예뻐하였다. 그는 사도(司徒)인 왕도(王道)의 아들과 조카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청혼하고자 했다. 중매인은 왕씨 집안의 젊은이들을 살펴 본 후, 치감에게 말했다. [왕씨댁의 자제들은 매우 훌륭하였습니다만, 한 자제는 배를 드러낸 채 침상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훗날 잠을 잤던 이 젊은이가 치감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는 왕도의 조카로서 후세에 이름을 날린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였다. 왕희지는 처남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사안과 사만 등과는 마음이 잘 맞았다. 한번은 왕희지의 아내가 친정에 다니러 와서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씨 집안 사람들은 사안과 사만이 오면 광주리를 다 쏟아(傾箱倒?) 음식을 차려 맞이하면서도, 너희들이 오면 평상시 처럼 대접하니 다음부터 번거롭게 왕씨 댁에 내왕하지 않도록 해라.]
[傾箱倒篋]이란 [가진 것을 모두 다 꺼내놓음]을 비유한 말이다. 어려운 나라 살림을 위해 달러 동전이라도 다 내놓아야 할 때이다.
184
叱石成羊(질석성양)
叱(꾸짖을 질) 石(돌 석) 成(이룰 성) 羊(양 양)
신선전(神仙傳)의 이야기. 옛날 황씨 성을 가진 형제가 있었다. 형의 이름은 황초기(黃初起)이고, 동생은 황초평(黃初平)이었다. 황초평이 14세가 되던 해, 하루는 산에서 양을 먹이고 있는데, 갑자기 한 도사(道士)가 나타났다. 도사는 초평을 제자로 삼고자 금화산의 한 동굴로 그를 데리고 갔다. 도사는 초평에게 신기한 재주를 가르쳐 주었다.
형인 황기초는 양치러 나간 동생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사방으로 찾아 나섰다. 몇일 후 산 꼭대기에 올라서야 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초평은 동생에게 물었다. [양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황초평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동쪽 산 위에 있다고 대답했다. 형은 급히 양을 찾으러 달려 갔만, 그곳에는 양은 없고 흰 바위 하나만 있었다.
동생인 황초평은 자신을 원망하는 형과 함께 동쪽 산으로 갔다. 그는 흰 바위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양들아, 일어나라!] 흰 바위는 순식간에 수만 마리의 양들로 변하였다. [叱石成羊]이란 [신기한 기술이나 괴이한 현상]을 비유한 말이다. 세상이 갈수록 답답해진다. 돌맹이를 금덩이로 바꾸는 기술이라도 배우고 싶은 심정이다.
185
妄自尊大(망자존대)
妄(허망할 망) 自(스스로 자) 尊(높을 존) 大(큰 대)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초, 유수(劉秀)는 동한을 건국하고 광무제(光武帝)가 되었지만, 전국은 여전히 군웅들이 날뛰는 상태였다. 당시 최대의 세력 중의 하나인 공손술(公孫述)은 사천지방에서 황제가 되었다. 한편 감숙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외효(??)는 정치적인 출로(出路)를 찾기 위해,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냈다. 마원은 공손술과 동향이었므로, 그가 자신을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마원은 공손술의 의례적인 접견에 매우 실망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 왔다. 그는 외효에게 말하길 [공손술은 진지한 마음으로 인재들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하려고 하기는커녕 스스로 잘난체 교만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견이 얕은 사람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뿐이며, 스스로 잘난체 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井底蛙耳, 妄自尊大). 우리의 뜻을 동쪽의 유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妄自尊大]란 [교만을 부리며 잘난 체 함]을 뜻한다. 역대 대선 후보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국정의 유일한 적임자라고 외쳐왔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모두들 [妄自尊大]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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狼狽爲奸(낭패위간)
狼(이리 랑{낭}) 狽(이리 패) 爲(할 위) 奸(범할 간)
당(唐)나라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의 이야기. [狼]과 [狽]는 모두 이리를 뜻하는 말이만, [狼]은 앞 다리가 길고 뒷 다리가 짧은 이리이고, [狽]는 앞 다리가 짧고 뒷 다리가 긴 이리이다. [狼]은 [狽]없이 혼자서 일어설 수 없고, [狽]는 [狼]없이 걸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狼과 狽는 항상 한 몸이 되다시피 하여 양을 훔치러 다녔으나, 울타리가 높고 단단하면 그들은 그걸 무너뜨릴 수 없었다. 이럴 때면 [狼]은 [狽]의 목에 올라타고 [狽]는 긴 두 다리를 이용해 일어섰다. 그런 후 [狼]은 울타리 너머로 긴 앞 다리로 뻗쳐 양을 잡아챘던 것이다.
[이리(狼)]의 다리는 사실 앞뒤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으나 [狽]는 가공의 동물인 것 같다. [실패나 사고, 또는 아주 난처한 상황]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이는 [낭패(狼狽)]라는 말은, 다리의 길이가 다른 두 이리를 묶어 걷게 하면 기우뚱거리며 넘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
유령회사를 차려 4천억원에 가까운 돈을 사취한 일당이 적발되었다. 모두들 狼과 狽처럼 서로 손발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던 모양이다. 이렇듯 [狼狽爲奸]이란 [서로 결탁하여 나쁜 일을 함]을 비유한 말이다.
187
酒囊飯袋(주낭반대)
酒(술 주) 囊(주머니 낭) 飯(밥 반) 袋(자루 대)
송(宋)나라 증조(曾?)의 유설(類說)에 나오는 이야기. 중국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 마은(馬殷)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는 목공일을 하였으나, 군에 입대한 후에는 손유(孫儒)라는 장수를 따라 양주(揚州)로 들어갔다. 그후, 유건봉(劉建峰)이라는 장군을 수행하여 담주(潭州)로 옮겨갔다. 훗날 유건종이 부하에게 피살되자, 마은은 곧 우두머리로 추대되었다. 그후 당(唐)나라 때에 마은은 담주 자사(刺史)로 임명되었다.
서기 907년, 대장군 주온(朱溫)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게 되자, 마은은 다시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다. 마은의 영향으로 그의 친척들도 모두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마은은 향락 만을 알았지 문무(文武) 따위는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일러 [술 주머니에 밥 자루(時謂之酒囊飯袋)]라고 하며 얕보았다.
마시고 노는데 귀한 달러를 뿌리는 일부 졸부들과 유학생들. 그들은 아직도 국가의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니, 정말 밥통에다 술자루같은 존재들이다. 이렇듯 [酒囊飯袋]란 [먹고 마실줄만 알지 일할 줄을 모르는 쓸모없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며, 한마디로 식충이(?)를 뜻한다.
188
鐵杵成針(철저성침)
鐵(쇠 철) 杵(공이 저) 成(이룰 성) 針(바늘 침)
명(明)나라 진인석(陳仁錫)의 잠확류서(潛確類書)의 이야기. 당(唐)나라의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은, 어렸을 때 공부를 싫어하고 놀기만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 어린 이백은 들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파가 손에 큰 쇠막대를 들고 돌에다 열심히 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여긴 이백은 그 노파에게 [할머니, 지금 무얼하고 계시죠?]라고 물었다. 그 노파는 이백을 쳐다보더니 [이걸 갈아서 가는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백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굵은 쇠막대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어요?] 그 노파는 이백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노력만 한다면 쇠막대를 갈아서 틀림없이 바늘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이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노파의 말은 도리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이백은 노파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렇게 하여 훗날 이백은 대시인이 되었던 것이다.
요즘 새마을 운동이나 국채보상 운동을 전개하자는 말이 들린다. 이는 어려운 경제를 다시 살려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리라. [鐵杵成針]이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함]을 비유한 말이다.
189
衆志成城(중지성성)
衆(무리 중) 志(뜻 지) 成(이룰 성) 城(성 성)
국어(國語) 주어(周語)의 이야기. 기원전 524년, 주(周)나라 경왕(景王)은 시장에서 유통되던 소액의 돈을 없애고 고액의 돈을 주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큰 손해를 입게 되었고, 그들의 원성(怨聲)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2년 후, 경왕은 민간에 남은 동전(銅錢)들을 수집하여 엄청나게 큰 종(鐘)을 만들었다. 경왕은 악관(樂官)을 불러 그 소리가 어떤지 물었다.
악관의 대답은 이러했다. [백성들에게 부담과 재물상의 손해를 주며 종을 만들었으니, 그 소리가 다른 악기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백성들 모두가 좋아하는 일은 성공하지 못할 일이 없으며, 백성들 모두가 싫어하는 일은 실패하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옛말에 {많은 사람들의 뜻은 견고한 성을 이루고, 많은 사람들의 말은 쇠를 녹인다(衆心成城, 衆口煉金)}고 했습니다. 군주께서 하신 일은 결국 실패한 것입니다.]
주나라의 경제 위기. 굳이 따지자면 실정의 책임은 독선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경왕에게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위기를 극복하려는 국민적 단결일 것이다. [衆志成城]이란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단결하면 그 역량이 커짐]을 비유한 말이다.
190
對牛彈琴(대우탄금)
對(대할 대) 牛(소 우) 彈(퉁길 탄) 琴(거문고 금)
남조(南朝) 양(梁) 승우(僧祐)의 홍명집(弘明集)에 나오는 이야기. 옛날 공명의라는 유명한 음악가가 어느 날 들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발견하였다. 그는 냇물 소리와 목동들의 피리 소리에 흥취가 돋자, 소를 향해 거문고를 퉁기기 시작했다.
반응을 보이지 않는 소에 화를 내는 공명의에게 어떤 사람이 말했다. [당신의 연주가 나쁜 게 아니고, 소가 당신의 음악을 모르는 것이오.] 공명의는 이를 믿지 않고, 아무렇게나 거문고의 줄을 세게 그었다. 갑자기 들리는 큰 소리에 소가 머리를 들고 꼬리를 저었다. 공명의는 다시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거문고로 소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보았다. 소는 다시 머리를 들고 공명의를 향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고명의는 소가 고상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라의 형편을 두고 말들이 많다. 아무개의 잘못이라며 저마다 한 마디씩이지만, 진정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같다. 야간 골프장과 향락업소가 여전히 붐빈다니 하는 말이다. [對牛彈琴]이란 [어리석은 자에게 도리를 말함]을 비유한 말이며, 곧 [소 귀에 경읽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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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浦珠還(합포주환)
合(합할 합) 浦(개 포) 珠(구슬 주) 還(돌아올 환)
후한서(後漢書) 맹상전(孟嘗傳)의 이야기. 중국 광서(廣西)지방의 합포(合浦)현은 합포주(合浦珠)라는 진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漢)나라 때, 합포군의 백성들은 모두 진주조개를 채취하여 생활을 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은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진주를 캐냈다. 이 바람에, 진주 조개가 자취를 감추고, 상인들의 내왕도 끊겼다. 백성들의 생활이 날로 궁핍해지고 굶어죽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자, 사람들은 [진주 조개들이 합포에서 살기 싫어 모두 월남땅으로 달아났네.]라고 한탄하였다.
동한(東漢)의 순제(順帝)가 즉위하자, 곧 맹상을 합포의 태수로 파견하였다. 맹상은 먼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불법행위를 엄단하여 진주 조개의 생산과 보호를 적극 지원하였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합포 바다에는 다시 진주 조개가 나타나고 생산량도 증가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떠났던 진주가 다시 돌아 왔네(去珠復還).]라고 말했다.
[合浦珠還]이란 [잃었던 것을 찾거나 떠난 것이 돌아옴]을 비유한 말이다. 사라져버린 번영, 그리고 한때 근면으로 상징되었던 국민성. 이것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올지의 여부는 오직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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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災樂禍(행재락화)
幸(바랄 행) 災(재앙 재) 樂(즐길 락) 禍(재화 화)
좌전(左傳) 희공(僖公) 14년조의 이야기. 춘추시기, 진(晋)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자 공자 이오(夷吾)는 진(秦)나라로 도망하였다. 이오는 귀국하기 전에 다섯 성을 진(秦)나라에 감사의 대가로 주기로 하였으나, 진(晋)의 군주, 즉 혜공(惠公)에 즉위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기원전 647년, 진(晋)나라에 가뭄이 들었다. 진혜왕은 지난 날의 일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대부 백리해(百里奚)의 권유로 진(晋)나라에 양식을 보내 주었다.
이듬해, 진(秦)나라는 기근이 들자 진(晋)나라에서 곡식을 사오려 했으나, 진혜공은 곡식을 팔지 않았다. 대부 경정은 진혜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은혜를 잊는다면, 이는 무친(無親)입니다. 또한 남의 어려움을 즐기는 것은 불인(不仁)이고, 물건을 남에게 주지 않는 것은 불상(不祥)이며, 이 일로 이웃 나라에게 죄를 짓는 것은 불의(不義)입니다.] 진혜공은 이를 틈타 진(秦)나라를 기습하였다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일본이 IMF지원과 독도문제를 함께 거론하려는 눈치다. 돈으로 독도를 사겠다는 발상이며, 제 2의 임진왜란(?)을 일으키려는 저의다. 이렇듯 [幸災樂禍]란 [남의 어려움을 보고 기쁨을 느낌]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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買寢還珠(매독환주)
買(살 매) 寢(궤 독) 還(돌아올 환) 珠(구슬 주)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어떤 초(楚)나라 사람이 진주(珍珠)를 얻게 되었다. 그는 진주를 높은 값에 팔기 위해, 향내나는 목란(木蘭)으로 작은 상자를 만들고, 다시 계초(桂椒) 등으로 향기를 물씬 풍기게 하였다. 그런 뒤 진주를 상자 안에 넣고, 다시 여러 가지 보석으로 상자의 겉을 장식했다.
초나라 사람이 진주 상자를 들고 시장에 나타나자, 정(鄭)나라 사람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진주 상자에 마음이 끌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진주상자를 샀다. 그는 진주 상자를 반나절 동안이나 살펴보고 비로소 상자을 열었다. 초나라 사람은 이 정나라 사람이 진주를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나라 사람은 진주를 초나라 사람에게 돌려주고는 빈 상자만을 들고 흐뭇한 표정으로 떠나버렸다. 초나라 사람은 상자 파는 솜씨는 훌륭했지만, 진주 파는데는 실패하였던 것이다.
모든 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선후(先後)가 있는 법이다. 허세 때문에 내실(內實)을 망친다면, 이는 정말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買寢還珠]란 [본연의 일은 잊고 지엽적인 일만을 추구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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負荊請罪(부형청죄)
負(질 부) 荊(가시나무 형) 請(청할 청) 罪(허물 죄)
사기(史記) 염파인상여(廉頗藺相如)열전의 이야기.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수하에는 인상여와 염파라는 두 인물이 있었다. 이들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기원전 279년, 진나라 소왕(昭王)이 혜문왕을 면지(慷池)의 연회석상에서 만났을 때, 인상여는 혜문왕의 기선을 꺾으려던 진나라 왕의 계책을 무산시켰다. 이에 앞서 인상여는 진나라로부터 화씨벽을 되찾아온 바 있는터라 명성이 염파를 능가하였다.
장군인 염파는 이러한 인상여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염파를 피하는 까닭을 묻는 부하들에게 인상여는 [지금 진나라가 우리 나라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위급을 뒤로하고 사사로운 원한만을 따진다면, 이는 진나라가 바라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염파는 이 말을 전해듣고, 웃옷을 벗은 채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인상여의 집 문앞에 와서 크게 사죄하였다.
[負荊請罪]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자청함]을 뜻한다. 이제 경제정책 실패에 대한 인책론이 일고 있다. 이는 회초리를 꺾어 들고 스스로 매 맞겠다고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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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上君子(양상군자)
梁(들보 량{양}) 上(위 상) 君(임금 군) 子(아들 자)
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시기, 태구현에 진식이라는 현령(縣令)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정직하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어느 해, 진식의 집에 도둑이 들어 대들보에 숨었다. 진식은 이를 모르는 척하며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나쁜 사람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평소에 배우지 아니하고, 자신을 엄하게 다스리지 아니하여, 차츰 나쁜 성품이 자라게 된 것이다. 지금은 대들보 위에 올라가 계신 군자가 바로 그러하니라.] 이 말을 듣고 있던 도둑은 얼른 대들보에서 내려와 진식에게 사죄하였다. 진식은 그에게 [모습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구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느냐.]했다.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며, 그것을 본전으로 하여 장사를 하라고 하였다.
[梁上君子]란 곧 [좀도둑]을 비유한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이 도둑은 그래도 [군자]다운 편이다. 뻔뻔스런 나라 도둑(?)과는 달리 배고픔때문에 남의 집 담을 넘은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사죄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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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中送炭(설중송탄)
雪(눈 설) 中(가운데 중) 送(보낼 송) 炭(숯 탄)
송사(宋史) 태종기(太宗紀)의 이야기. 북송(北宋) 초, 토지 겸병을 둘러싼 귀족들의 분란이 심해짐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삶도 몹시 궁핍해졌다. 서기 993년, 즉 북송 태종 순화(淳化) 4년 봄, 빈곤을 참지 못한 농민 왕소파(王小波)와 이순(李順)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사천(四川)에서 봉기하였다.
그 해 겨울, 여러 날 동안 눈이 내리고 날씨 또한 매우 추웠다. 태종인 조광의(趙光義)는 왕소파와 이순 등의 농민 봉기에 두려움을 느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 다시 봉기가 일어날까 염려되어, 사람을 시켜 몇몇 어려운 노인들과 가난한 백성들의 집에 돈과 쌀, 땔감을 보냈다(賜孤老貧窮人千錢米炭).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민심을 수습하려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부를 잘하는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이 일을 역사에 기록하게 하였다.
외환대란이 일어난 우리 나라에 드디어 달러 공급이 시작되었다. 영락없이 밀가루나 담요 따위의 구호물자(?)를 받는 기분이다. 하지만 급한 판국이니 그저 받아 쓰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雪中送炭]이란 [급히 필요할 때 필요한 도움을 줌]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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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郞自大(야랑자대)
夜(밤 야) 郞(사나이 랑) 自(스스로 자) 大(큰 대)
사기(史記) 서남이(西南夷)열전의 이야기. 서한(西漢)시기, 중국의 귀주(貴州)와 운남(雲南) 지방은 지리적인 조건으로 한나라 조정과의 내왕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 지방의 사람들은 한나라의 정치적 상황에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당시 귀주에는 야랑국(夜郞國)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운남에는 전국(?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크기는 한나라의 현(縣)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서기 122년, 한무제는 왕연우라는 사신을 두 나라에 파견하였다. 먼저 전국에 도착한 사신들에게 전국의 왕은 세상 넓은 것을 모르고 [한나라와 우리 나라 중 어느 쪽이 더 큰가?]라고 물었다. 왕연우는 전국의 국왕이 오만하고 무지한 사람으로서 내왕할만 인물이 못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야랑국을 방문하였는데, 뜻밖에 양랑국의 국왕도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이들은 중원과 단절되어 외국의 상황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금융 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경제 관료들. 이 상황에서 아이 키재기(?)에만 열올리는 후보들. 이들은 모두 다른 나라 사람들인 것 같다. [夜郞自大]란 [좁은 식견에 제 잘났다고 뽐냄]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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矯枉過正(교왕과정)
矯(바로잡을 교) 枉(굽을 왕) 過(지날 과) 正(바를 정)
후한서 중장통(仲長統)전의 이야기. 중장통은 동한(東漢) 영제(靈帝) 때의 유명한 문인이다. 그는 이란편(理亂篇)이라는 글에서, 당시의 정치적 혼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제왕(帝王)들 중 어떤 이는 썩 총명하지 못하여, 나라 안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만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라 안의 모든 업적을 모두 자기의 공로로 돌리며 아무도 자신을 뒤엎지 못하리라 믿게 된다. 그 결과, 온 나라가 분란에 휘말리게 되고, 이민족들은 이 틈을 노려 침범해 오며, 마침내 나라는 무너지고 왕조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길 [정치가 잘 이루어지는 때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기풍과 혼란을 바로 잡고자 하나, 굽은 것을 바로 잡으면서 마땅한 정도를 지나치게 되기도 한다(復入于矯枉過正之檢). 때문에, 효과를 얻으려다 도리어 예상한 목적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정부의 금융 증권 안정대책이 발표되었다. 비상 처방이라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된다. [矯枉過正]은 [교왕과직(矯枉過直)]이라고도 하며, [잘못을 바로 잡음에 그 정도가 지나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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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芳百世(유방백세)
流(흐를 유{류}) 芳(향기 방) 百(일백 백) 世(대 세)
진서(晋書) 환온전(桓溫傳)의 이야기. 동진(東晋) 시기, 진(晋)나라와 북방 이민족들은 서로 끊임없는 마찰을 빚어왔다. 서기 354년, 환온은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북벌에 나서 전진(前秦)을 공격했다. 환온의 세차례에 걸친 북벌은 저족(?族), 강족(羌族), 선비족(鮮卑族) 등 북방 이민족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서기 363년, 환온은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으며, 조정에서는 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여 그의 지위는 제후들보다 더 높았다. 환온은 군사대권을 장악하고 중원(中原) 회복함으로써 자신의 명망을 높여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환온은 일찍이 [대장부가 훌륭한 명성을 후세에 전할 수 없다면, 죽은 뒤 나쁜 이름이라도 세상에 남겨야 한다.]라는 말을 하였다. 서기 373년, 61세의 환온은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야망을 버리지 않았으나, 재상 사안(謝安)의 저지로 야심을 이루지는 못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야망을 갖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러운 이름으로 역사에 전해지는 것은 악취만년(惡臭萬年)일 뿐이다. [流芳百世]란 [훌륭한 명성을 후세에 영원히 전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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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疾忌醫(휘질기의)
諱(꺼릴 휘) 疾(병 질) 忌(꺼릴 기) 醫(치료할 의)
송나라 주돈이(周敦滯)의 주자통서(周子通書)에 나오는 이야기. 춘추시대, 채(蔡)나라에 편작(扁鵲)이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채나라 환공(桓公)에게 [대왕께서는 병이 나셨는데, 그 병은 피부에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시지 않으면 심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채환공은 병이 없다면서 치료를 거절했다. 열흘 후, 편작은 채환공을 알현하고 그에게 병이 살 속까지 퍼져서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심각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환공이 이를 무시하며 몹시 불쾌해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편작은 채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내장에 이르렀으니,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환공은 여전히 이를 무시하며 화를 냈다. 열흘 후, 편작은 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골수에 이르러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닷새 후, 채환공은 온몸에 고통을 느끼며 결국 죽고 말았다.
[諱疾忌醫]란 [자신의 결점을 감추고 고치려 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TV 토론회에 참석했던 대선 후보들. 상대의 결점을 찾아내는데는 편작의 뺨을 칠 정도였지만, 정작 자신들의 결점을 시인하는데는 인색했다.
201
任人唯賢(임인유현)
任(맡길 임) 人(사람 인) 唯(오직 유) 賢(어질 현)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하(外儲說左下)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제(齊)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여 양공(襄公)이 피살되었다. 이듬해 양공의 두 동생인 공자(公子) 규(糾)와 공자 소백(小白)은 서둘러 제나라로 돌아와 왕위를 다퉜다. 제나라 환공(桓公)으로 즉위한 소백은 공자 규를 죽이고, 그의 측근인 관중을 잡아 보내도록 하였다.
압송되던 관중은 제나라의 변방에 이르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변방을 지키는 관원에게 음식을 좀 부탁했다. 이 관원은 제나라 환공이 관중을 중용할 것으로 생각하여, 매우 정중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는 관중에게 [만약 제나라에 도착하여 중용되면, 저에게 어떤 보답을 하시겠오?]라고 물었다. 관중의 대답은 이러했다. [만약 당신의 말대로 된다면, 나는 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임용할 것이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어떠한 보답을 할 것 같소?] 그 관원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은 잘못 고른 인물들 때문이다. 이제 새 대통령과 능력있는 인물들이 환상적인 드림팀(?)을 이루었으면 한다. [任人唯賢]이란 [오직 재능과 인품만을 보고 사람을 임용함]을 뜻한다.
202
挺身而出(정신이출)
挺(빼어날 정) 身(몸 신) 而(말 이을 이) 出(날 출)
당(唐)나라의 개국황제인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에게는 건성(建成), 세민(世民), 원길(元吉) 등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인 건성은 태자(太子)에 옹립되고 세민은 진왕(秦王)에, 원길은 제왕(齊王)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세민은 부친을 도와 당나라 건국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의 위엄과 명망은 세 아들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았다.
태자 건성은 제위계승을 세민에게 빼앗기게 될까 두려워 원길과 연합하여 그을 죽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음모를 알아차린 세민은 먼저 공격에 나서 건성과 원길을 죽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건성과 이원길의 부하들이 이세민을 공격하여, 현무문을 지키고 있던 경군홍(敬君弘)의 병력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경군홍은 놀라운 용맹성을 발휘하여, 빗발같은 화살 속을 뚫고 반격에 나서 결국 국면을 진정시켰다. 훗날, 당태종으로 즉위한 이세민은 경군홍의 임전무퇴 정신을 치하하였다.
지금의 상황을 걱정하면서도, 일부에서는 생필품 사재기에 열심이다. 하지만 난국을 돌파하는 길은 국민적 협조와 공직자들의 책임 완수뿐이다. [挺身而出]이란 [위급할 때 과감히 나서 모든 책임을 다함]을 뜻한다.
203
大器晩成(대기만성)
大(큰 대) 器(그릇 기) 晩(늦을 만) 成(이룰 성)
삼국지 위서(魏書) 최염(崔琰)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말년, 원소(袁紹)의 측근에 최염이라는 식객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하여, 23세에야 논어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처음 원소의 부하로 일했으나, 후에는 조조(曹操)의 휘하에서 상서(尙書)를 지내며 태자 옹립문제를 해결하여 공정한 관리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최염에게는 최림(崔林)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명망도 없었으므로,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그를 경시하였다. 그러나 최염은 항상 그를 존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는 큰 그릇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此所謂大器晩成者也). 그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최림은 훗날 위(魏) 문제(文帝)의 휘하에서 사공(司空)을 지냈다.
50년만의 정권 교체. 마침내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런 경우 [大器晩成] 만큼 잘 어울리는 말은 없으리라. [大器晩成]이란 [큰 인물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뒤늦게 이루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204
城下之盟(성하지맹)
城(성 성) 下(아래 하) 之(-의 지) 盟(맹세할 맹)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桓公) 12년조의 이야기. 춘추시기, 초(楚)나라 군대가 교(絞)나라를 침공하여 교나라 도읍의 남대문에 이르렀다. 교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는 몇 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초나라의 장군 굴하(屈瑕)는 무왕(武王)에게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이튿날, 초나라는 수십명의 병사들을 나뭇꾼으로 변장시켜 성곽 주변의 산에서 나무를 하는 척하게 하였다. 교나라의 군인들은 그들을 즉시 잡아와, 득의만만해 하였다. 이튿날, 초나라의 같은 작전에 속아 넘어간 교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잡으러 성문을 열고 나오자, 미리 매복해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교나라 도성을 포위하며, 총공격을 해들어왔다. 교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도성 아래에서 굴욕적인 맹약을 맺고 초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IMF와의 협상으로 사실상 경제 주권을 상실하였다. 많은 국민들이 치욕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렇듯 [城下之盟]이란 [압력에 의한 굴욕적인 조약이나 협약]을 비유한 말이다.
205
一飯千金(일반천금)
一(한 일) 飯(밥 반) 千(일천 천) 金(쇠 금)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의 이야기. 한신(韓新)이 무명의 서민이었을 때, 집안이 가난한데다가 별 재간도 없어서 항상 남에게 얹혀 먹고 사는 신세였다. 이렇다보니 그를 싫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찍이 남창(南昌)의 한 마을의 촌장 집에서 자주 밥을 얻어 먹었는데, 여러 달씩이나 신세를 진적도 있었다. 한신을 귀찮게 여기던 촌장의 아내는 아침 밥을 지어 몰래 먹어 치우곤 하였다.
어느 날, 한신은 회수(淮水)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마침 물가에서 무명을 표백하고 있던 노파들을 보았다. 그들 중 한 노파가 굶주린 한신의 모습을 보고 수십 일동안 그에게 밥을 먹여 주었다. 이에 한신은 크게 감동하여 [언젠가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신은 초왕(楚王)에 봉하여진 뒤, 고향 회음에 와서 자신에게 밥을 주었던 노파를 찾아 천금을 주고, 촌장에게는 일백전의 돈을 주었다.
작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큰 보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한다. [一飯千金]이란 한 끼니 밥에 천금이라는 뜻으로 [은혜에 후하게 보답함]을 비유한 말이다.
206
一鳴驚人(일명경인)
一(한 일) 鳴(울 명) 驚(놀랄 경) 人(사람 인)
사기 골계(滑稽)열전의 이야기. 전국시대,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국정에 무관심하게 되자, 나라는 혼란하게 되고 제후들의 침략 또한 빈번하여졌다. 하지만 이를 간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순우곤(淳于?)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익살이 좋았다. 그는 위왕이 수수께끼를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 나라에 큰 새가 있는데, 그 새는 왕궁에 살면서 3년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새가 무슨 새인지를 알고 계시는지요?]
위왕은 [그 새는 날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 번 날았다하면 하늘 끝까지 날아 오를 것이다. 또 울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번 울었다 하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위왕은 깨달은 바가 있어, 생활 태도를 바꾸고 국정을 챙기고 나섰다. 그는 외치(外治)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여 침략당한 영토를 되찾았다. 이후, 위왕은 36년 동안 제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一鳴驚人]이란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한번 시작하면 큰 일을 하여 사람을 놀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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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髮千鈞(일발천균)
一(한 일) 髮(터럭 발) 千(일천 천) 鈞(서른 근 균)
한서(漢書) 매승(枚乘)전의 이야기. 서한(西漢) 시기, 매승이라는 유명한 문인이 있었는데, 그는 사부(辭賦)에 능했다. 그는 오왕(吳王) 유비(劉?)의 휘하에서 낭중(朗中)을 지내며, 오왕이 모반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오왕에게 모반을 포기하도록 권고하였다.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삼만근 무게의 물건이 위는 그 끝을 모를 높은 곳에 매달려 있고, 아랫부분은 바닥이 없는 깊은 못에 드리워져 있다고 합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상황이 극히 위태롭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만약 윗부분이 끊긴다면 다시 이을 수 없으며, 아랫부분이 깊은 못으로 떨어진다면 다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왕께서 모반하시려는 것은 바로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다린 것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자, 매승은 오나라를 떠나 양(梁)나라로 가서 양효왕의 문객이 되었다. 그후 오왕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치솟는 환율과 곤두박질 치는 주가. 무너지는 기업과 금융기관. 이는 한 올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우리 경제의 실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들이다. [一髮千鈞]이란 [극도의 위험에 처해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208
開源節流(개원절류)
開(열 개) 源(근원 원) 節(절제할 절) 流(흐를 류)
춘추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학자 순황(荀?)은 순자(荀子)를 저술하였다. 그는 부국(富國)편에서 국가의 강약과 빈부에 대해 설명하였다. 국가가 부강해지고자 한다면, 조정은 백성들을 사랑해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생산에 임하며, 그 축적된 것이 증가함에 따라 국고(國庫)가 충실해지고, 국가는 곧 부강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조정에서 생산은 돌보지 않고 무거운 세금만 부과하며 물자를 아끼지 않는다면, 백성들과 나라가 빈곤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이에 대한 군주의 의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온 백성이 천시(天時)의 화기(和氣)를 얻고 사업에 차서를 얻으니 이는 재화의 본원이요, 차등을 두어 거둬들인 국고의 저장물은 재화의 지류(支流)이다. 그러므로 명철한 군주는 반드시 신중하게 화기를 기르고 그 지류를 절제하며, 재화의 원천을 더욱 개발하여야 한다(節其流, 開其源).]
가계(家計)도 나라도 모두 힘들다. 가라앉은 분위기다. 더 일하고 덜 쓰는 수밖에 없다. [開源節流]란 [재원을 늘리고 지출을 줄임]을 뜻한다.
209
日暮途遠(일모도원)
日(해 일) 暮(저물 모) 途(길 도) 遠(멀 원)
사기 오자서(伍子胥) 열전의 이야기. 전국시기, 오사(伍奢)와 비무기(費無忌)는 모두 초평왕(楚平王)의 태자 건(建)의 스승이었는데, 비무기는 계략에 능하고 음흉한 사람이었다. 그는 태자 건의 혼인문제로 태자가 자기에게 보복할까 두려워, 태자에게 충성하는 오사와 오상 등을 죽였다.
오사의 아들인 오자서는 오(吳)나라로 도망하여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오왕 합려(闔閭)에게 제의하여 초나라의 도성인 영(?)을 공략했다. 이때, 초나라는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는데, 그는 공격을 피해 도망해 버렸다. 소왕을 놓친 오자서는 대신 초평왕의 무덤에서 그의 시체를 끌어내어 3백번이나 매질을 하였다.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이를 너무 가혹한 짓이라고 그를 꾸짖었다. 오자서는 그에게 말했다. [해는 저물고 갈길은 아직 멀고, 나는 초조한 나머지 도리에 따를 수만은 없었서 그만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였다네.]
[日暮途遠]이란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할 일은 아직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몰락하는 경제와 이틀 남은 1997년. 이루기는커녕 잃기만 한 채 이 해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210
有備無患(유비무환)
有(있을 유) 備(갖출 비) 無(없을 무) 患(근심 환)
춘추좌전 양공(襄公) 11년조의 이야기. 기원전 641년, 진(晋)나라 도공(悼公)은 11개 동맹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당시 약소국으로서 맹주(盟主)인 진나라 덕분에 전란을 피할 수 있었다. 정나라는 악사, 전차, 가녀(歌女)와 많은 악기를 감사의 예물을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 도공은 이를 받고 대단히 기분이 좋아 예물의 반을 대신 위강(魏絳)에게 주었다.
그러나 위강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이렇게 화평하게 된 것은 우리 국가의 복이옵고, 8년간에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화합시키어 제후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 것은 군주의 덕택입니다. 신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 서경(書經)에 이르길, 편안히 있으며 위태로움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잘 생각하면 대비가 있게 되고, 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 신은 이것을 규범으로 삼으시도록 아룁니다]
외환(外換)이 외환(外患)인 때, 1달러에 2천원. 이는 실로 [無備無換(?)]의 상황이다. [有備無患]이란 [미리 준비해 두면 걱정이 없음]을 뜻한다.
211
捲土重來(권토중래)
捲(말 권) 土(흙 토) 重(거듭 중) 來(올 래)
당대(唐代) 시인 두목(杜牧:803-852)의 제오강정(題烏江亭)이라는 시.
초한(楚漢)이 천하를 다투던 때,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한나라의 포위를 빠져 나와 천신만고 끝에 오강(烏江)까지 퇴각하였다. 오강의 정장(亭長)은 항우를 위해 배를 한 척 준비해 놓고 그에게 강을 건너라고 했다. 그러난 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절했다. 그는 살아남은 20여명의 병사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대세를 반전시키지 못하고 31년의 생애를 자결로 마쳤다.
항우가 죽은 지 1,0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시인 두목은 패배의 수치를 참지 못하고, 훗날을 도모하지 않은 채 자결해 버린 항우를 애석히 여기며 시 한 수를 지었으니,
[승패란 병가에서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니, 수치를 삼키고 참는 것이 바로 남아로다. 강동의 자제 중에는 재능있고 뛰어난 이들이 많은데, 흙 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올 것은 알지 못 하였구나(捲土重來未可知).]
국치(國恥)를 경험했던 이 해가 저물었다. 새로운 다짐으로 새해를 맞아야 할 때이다. [捲土重來]란 [실패 후 재기를 다짐함]을 비유한 말이다.
212
近悅遠來(근열원래)
近(가까울 근) 悅(기쁠 열) 遠(멀 원) 來(올 래)
논어 자로(子路)편의 이야기.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공자(孔子)는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였다. 위(衛), 조(曹), 송(宋), 정(鄭), 채(蔡) 등의 나라를 돌다가 당시 초(楚)나라에 속해 있던 섭읍(葉邑)에 이르렀다. 이 당시 초(楚)나라에는 심제량(沈諸梁)이라는 대부(大夫)가 있었는데, 그의 봉지(封地)가 섭읍이었으므로, 스스로 섭공(葉公)이라 했다.
섭공은 공자를 보고, 그에게 [정(政)]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다. 공자는 이 물음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은 언급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政)이란, 가까운 데서는 기뻐하고, 먼데서는 오는 것입니다(近者悅, 遠者來).]
이는 정치를 잘 하면 인근 국가의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게되어 기뻐하고, 먼 나라의 사람들도 정치 잘하는 것을 흠모하여 모여든다는 것을 뜻한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 대통령에 새 정부. 그리고 새로운 정치. 모두 기분 좋은 출발이다. 올해에는 좋은 정치 덕분에 국민들이 늘 기뻐하고, 우리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몰려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近悅遠來]란 [좋은 정치의 덕(德)이 널리 미침]을 비유한 말이다.
213
未能免俗(미능면속)
未(아닐 미) 能(능할 능) 免(면할 면) 俗(풍속 속)
세설신어 임탄(任誕)편의 이야기. 진(晉)나라 초, 완함(阮咸)과 숙부 완적(阮籍)은 모두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길의 남쪽에 살았으며, 그밖의 완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길의 북쪽에 살았다. 그런데 북쪽의 완씨들은 모두 부유했지만, 남쪽의 완씨들은 매우 가난했다.
당시에는 매년 7월 7일에 겨울옷을 꺼내어 햇볕에 말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마치 잘 사는 티를 내는 시합을 하는 것같았다. 어느 해 7월 7일, 관습대로 북쪽의 완씨들은 옷을 꺼내 말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훌륭한 비단 옷들뿐이었다. 하지만 남쪽의 완함과 완적은 이 일에 대해 이미 신물이 난 상태인지라, 완함은 긴 장대에다 낡은 포대기와 헌 바지를 걸어 놓고 햇볕을 쪼였다. 어떤 이가 이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완함에게 물었다. 완함은 웃으면서 [풍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하고 있을 뿐이오.]라고 대답했다.
한때 신정(新正)에 밀려 구정(舊正)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풍양속이란 제도보다 강한 것이어서, 대부분 구정을 설로 쇠고 있다. [未能免俗]은 [전해 내려온 습속을 따를 수 밖에 없음]을 뜻한다.
214
竹頭木屑(죽두목설)
竹(대 죽) 頭(머리 두) 木(나무 목) 屑(가루 설)
진서(晉書) 도간전(陶侃傳)의 이야기. 진(晉)나라 초, 파양(碍陽)이라는 곳에 도간(陶侃)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명한 도연명(陶淵明)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그는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오히려 검소했다. 도간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던 까닭에 어려운 환경에서 홀어머니에 의해 자랐다. 때문에 그는 무엇을 하든지 항상 절약하였다.
그가 배를 만드는 일을 관리하던 때, 이 과정에서 많은 대나무 뿌리와 나무 부스러기 등이 버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은 시켜 이것들은 전부 모아 기록해 놓도록 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어느 해, 새해 모임이 있었던 날, 많은 눈이 내린 후 날씨가 풀리자, 길은 온통 진흙탕이 되었다. 도간은 즉시 나무 가루을 꺼내 길위에 뿌렸다. 그는 후에도 많은 폐품들을 모아서 여러 가지 급한 곳에 사용하였다.
쓸 만한 물건들이 자주 버려지고, 아파트 내부 개조를 위해 멀쩡한 시설물을 떼어 버리는 일이 잦다. 싫증이 났거나 구식이 아니면 싸구려이기 때문이란다. 정말 배 부른(?) 소리다. [竹頭木屑]이란 [못 쓰게 된 것들을 모아 후에 다시 활용함]을 비유한 말이다.
215
狐疑不決(호의불결)
狐(여우 호) 疑(의심할 의) 不(아닐 불) 決(터질 결)
술정기(述征記)의 이야기. 맹진(盟津)과 하진(河津)은 모두 황하(黃河)에 있는 나루터이다. 맹진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맹현(孟縣)에 있었으며, 하양도(河陽渡)라고도 하였다. 하진은 중국의 산서성 하진현(河津縣)에 있었다. 이 두 곳은 양자강보다는 좁고, 회하(淮河)나 제수(濟水)보다는 넓었다.
겨울이 되어 얼음이 얼면 두꺼운 곳은 몇 장(丈)에 달했으므로, 거마(車馬)들도 얼음 위로 통과할 수 있어 나룻배보다 편리하였다. 하지만 얼음이 막 얼기 시작할 때에, 사람들은 섣불리 건너지 못하고 먼저 여우들을 건너가게 하였다. 여우는 본시 영리한 동물로서 청각이 매우 뛰어났다. 여우는 얼음 위를 걸으면서도 이상한 소리가 나면 곧 얼음이 갈라지는 것을 예감하고 재빨리 강가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렇게 여우가 강을 다 건너간 것을 확인하고나서야 안심하고 수레를 출발시켰던 것이다.
의심많은 여우의 성질을 이용한 사람들의 지혜. 이는 사람들이 여우를 의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지나친 의심은 사회의 결집력을 약화시킨다. 이제는 서로 믿는 분위기가 필요한 때이다. [狐疑不決]이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216
面壁功深(면벽공심)
面(낯 면) 壁(벽 벽) 功(공 공) 深(깊을 심)
오등회원(五燈會元) 동토조사(東土祖師)편의 이야기. 남북조시대에 불교가 흥성하자,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왔다.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천축국 향지왕(香至王)의 셋째 왕자인 달마(達摩)는 광동지방을 지나 양나라의 수도인 건업(建業)에 도착하였다. 달마는 건업을 떠나 북위(北魏)의 영토인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달마는 소림사에서 밤낮으로 벽을 향해 앉은채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面壁而坐, 終日黙然,). 그에게 무슨 오묘함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마가 이렇게 수행하기를 9년. 그리고 그는 죽었다.
소림사의 서쪽에는 높이가 2 장(丈)이나 되는 석벽(石壁)이 있다. 얼핏 보면 보통 돌 같지만, 대여섯 걸음 물러나서 보면, 달마가 정좌(靜坐)하고 있는 모습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달마가 9년 동안 면벽하며 도를 닦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요즘 벽 뚫는(?) 범죄가 부쩍 늘고 있다. IMF시대의 도둑들은 달마신공(?)이라도 연마한 것일까. 정말 기막힌 공력들이다. [面壁功深]이란 [오랜 수련을 통하여 깊은 경지에 이름]을 비유한 말이다.
217
蕭規曹隨(소규조수)
蕭(맑은 대쑥 소) 規(법 규) 曹(나라 조) 隨(따를 수)
한나라 양웅(楊雄)의 해조(解嘲)에 실린 이야기. 진(秦)나라 말, 소하(蕭何)는 한고조 유방을 도와 반진(反秦)의 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한 왕조를 세우는데 공이 컸기 때문에, 흔히들 한신(韓信), 장량(張良) 등과 더불어 [한흥삼걸(漢興三杰)]이라 부른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진나라의 함양을 공격할 때, 병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납치하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소하는 상부(相府)로 달려가서 지도와 법령 등 중요한 문건들을 수습했다.
훗날, 소하는 재상(宰相)이 되자, 이미 확보한 진나라의 문헌과 자료들을 토대로 전국의 지리나 풍토, 민심 등을 파악하여,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제정하였다. 당시 유방의 수하에는 조참(曹參)이라는 모사(謀士)가 있었다. 그는 유방의 동향 사람으로서 소하와도 관계가 매우 좋았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소조(蕭曹)]라고 불렀다. 소하의 추천으로 승상된 조참은 모든 정책과 법령을 고치지 않고, 소하가 결정해 놓은 것을 따라(蕭規曹隨) 계속 집행하였다.
[蕭規曹隨]란 [전인(前人)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답습함]을 비유한 말이다.
218
遼東之豕(요동지시)
遼(멀 요) 東(동녘 동) 之(-의 지) 豕(돼지 시)
후한서(後漢書) 주부(朱浮)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말, 주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쟁에 참가하여 약간의 무공을 세워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로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여 항상 자랑하고 다녔다.
천하가 태평해지자, 주부처럼 평범한 군인들은 별 볼일이 없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요동에 갔다가, 검은 돼지가 머리털이 흰 새끼를 낳은 것을 보고 매우 희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머리털이 흰 돼지 새끼를 황제에게 바쳐 환심을 사고자 하동(河東)으로 갔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서 보니 검은 돼지 뿐만 아니라 머리털이 흰 돼지는 말 할 것도 없고, 몸 전체가 흰 돼지도 엄청나게 많았다. 주부는 끌고 갔던 돼지 새끼를 바라보며, 자신의 행동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곧장 돌아온 그는 다시는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첨단 시대. 희귀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흰 돼지 따위에 감탄할 틈이 없는 때이다. [遼東之豕]는 [요동의 돼지]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아 무엇이든지 희귀하게 여김]을 비유한 말이다.
219
投筆從戎(투필종융)
投(던질 투) 筆(붓 필) 從(좇을 종) 戎(되 융)
한서 반초(班超)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초, 반고(班固)와 반초(班超) 형제가 있었다. 그들의 집안은 서한 말의 시대적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점차 빈곤해지기 시작했다. 형 반고가 낙양(洛陽)에서 관직을 맡게 되자, 동생 반초도 어머지와 함께 낙양으로 왔다. 낙양에서는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반초가 관청에서 문서를 베껴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북방의 흉노들은 끊임없이 한나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반초는 문서를 베끼다가 변방을 안정시켰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생각하고, 마음이 괴로웠다. 그는 홧김에 붓을 내던지면서 외쳤다.
"대장부는 큰뜻을 품고 나라의 변방을 안정시키는 일을 해야 하거늘 어찌 하루종일 붓만 들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곧 군에 입대하여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41세 때에는 서역으로 가서 흉노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31년 후 그는 백발 노인이 되어 귀국하였다. 반초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지만,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입대하려는 대학생들이 증가하고 있다. "흉노"보다 무서운 IMF 때문이다.
[投筆從戎]이란 [학문을 포기하고 종군(從軍)함]을 뜻한다.
220
取而代之(취이대지)
取(취할 취) 而(말 이을 이) 代(대신할 대) 之(그것 지)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의 이야기. 진(秦)나라 때, 초(楚)나라의 귀족이었던 항량은 조카 항우(項羽)가 학문을 하거나 무술을 연마해 주기 바랬다. 하지만 항우는 숙부인 항양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글 공부는 자기의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하고, 검법은 한 사람만을 상대하는 것이므로 배울 가치가 없습니다. 저는 만인(萬人)을 대적하는 일을 배우겠습니다.]
항우가 20세 되던 해, 숙부 항량은 사람을 죽이고 오중(吳中)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진시황(秦始皇)은 6국을 통일하고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기 위해 전국을 순시하고 있었다. 항량과 항우가 오중에 있던 그 해, 마침 진시황도 그곳에 오게 되었다. 사람들 속에 끼어 진시황의 행렬을 지켜보던 항우가 항량에게 말했다.
[저 사람의 자리를 제가 대신할 것입니다(彼可取而代也).]
대통령직 인수위를 두고 잡음이 좀 있었다. 잘못한 구관(舊官) 사또와 꾸짖는 신관(新官) 사또가 서로 다투는 듯했다. 이를 보고 가능하다면 좀 빨리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도 있는 것 같았다. [取而代之]란 [지위나 물건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로 대신함]을 뜻한다.
221
一暴十寒(일폭십한)
一(한 일) 暴(사나울 포) 十(열 십) 寒(찰 한)
맹자 고자장구 상편의 이야기. 전국시대, 유세(遊說)가 성행하였는데, 맹자 또한 당시의 세객(說客)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여러 나라를 유세한 적이 있었으며, 제나라에서는 선왕(宣王)의 객경(客卿)을 지냈다. 맹자는 제나라에 있을 때, 선왕이 국가를 다스림에 별 업적이 없으며, 일처리가 경솔하고 참언을 쉽게 믿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맹자는 선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이 지혜롭지 못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쉽게 자라는 물건이 있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 해를 쬐고 열흘 동안 차게 하면(一日暴之十日寒之) 자라날 물건이 없다. 내가 왕을 만나 보긴 하지만 그 기회는 역시 드물고, 내가 물러나면 그를 차게 하는 자가 오니, 내가 싹을 트게 해 준다고 한들 무엇이 되겠는가?]
새 정부에서 초등학교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전면 폐지하자는 의견도 있고, 수정 보완하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본 정책의 일관성이리라. [一暴十寒]이란 [어떤 일에 일관성이 없어 자주 끊김]을 비유한 말이며, [하다 말다 하는 것]을 뜻한다.
222
彈冠相慶(탄관상경)
彈(탄알 탄) 冠(갓 관) 相(서로 상) 慶(경사 경)
한서(漢書) 왕길전(王吉傳)의 이야기. 서한(西漢) 시기, 왕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품행이 단정하였다. 선제(宣帝)의 휘하에서 관리를 지내면서도 항상 밤 늦도록 책을 읽었다. 그의 아내는 매일 밤참으로 대추를 내놓았다. 어느 날, 왕길은 아내가 옆집 대추나무에서 그 대추를 몰래 따냈음을 알고, 그녀를 내쫓아버렸다. 이웃사람들은 그에게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고 했지만, 그는 옆집 사람이 대추를 수확한 다음에 아내를 데려 오겠다고 했다.
왕길은 황제들에게 몇 차례 글을 올려 그들의 향락 행위와 조정의 일에 대하여 간언하였다. 이 일로 그는 큰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고향 친구인 공우는 이 소식을 듣고, 마침내 자기에게도 벼슬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자기 모자의 먼지를 툭툭 털면서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풍자하여, [왕길이 벼슬에 나가니, 공우가 부임할 채비를 하네.]라고 하였다. 벌써 새 정부의 인선(人選)이 관심거리다. 하지만 될 사람이 되어야지 친구 덕에 모자의 먼지나 터는(?) 그런 사람은 곤란하다. [彈冠相慶]이란 [벼슬하게 됨을 서로 축하함]을 비유한 말이다.
223
明珠彈雀(명주탄작)
明(밝을 명) 珠(구슬 주) 彈(탄알 탄) 雀(참새 작)
장자(莊子) 양왕(讓王)편의 이야기. 노(魯)나라 애공(哀公)은 안합(安闔)이 도를 터득한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예물을 들고 그를 찾아가 보게 하였다. 애공의 사자가 찾아가 보니, 안합은 허술한 집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소를 돌보고 있었다. 안합은 사자를 돌려 보냈다. 사자가 다시 그의 집을 찾았지만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장자는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안합은 부귀에 뜻이 없었으며, 부귀가 찾아오는 것도 환영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군자들은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부귀를 추구하는데,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떤 사람이 수후(隨侯)의 보석으로 천길 벼랑 위에 있는 참새를 쏘았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분명 그를 비웃을 것이다(以隨侯之珠彈千?之雀).]
요즘 금모으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돌반지, 결혼반지 등등 추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들이 모아 지고 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이 틈을 노려 묵직한 금붙이를 사 모으고 있다니, 이야 말로 금 몇 돈 때문에 나라를 말아 먹을(?) 짓이다. [明珠彈雀]이란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음]을 비유한 말이다.
224
庭訓(정훈)
庭(뜰 정) 訓(가르칠 훈)
논어 계씨(季氏)편의 이야기. 공자의 제자인 진항(陳亢)이 공자의 아들인 백어(伯魚)에게 [아버님에게서 다른 말씀이라도 들은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백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는 것을 보시더니 저에게 '시를 배웠느냐?'라고 물으시기에 '아직 안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러 나와 시를 공부했습니다. 다른 날, 역시 제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는데 '예(禮)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시기에 저는 '아직 안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예를 배우지 않으면 남의 앞에 나설 수가 없느니라'라고 하시기에 저는 예를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들은 것은 이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공자의 아들은 뜰을 걷다가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를 일러 [정훈(庭訓)]이라 한다. 어려운 형편에 학원비까지 올라 집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하니, 모두 [庭訓]을 받고 있는 셈. [庭訓]이란 곧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뜻한다.
225
一丘之狢(일구지학)
一(한 일) 丘(언덕 구) 之(-의 지) 狢(담비 학)
한서(漢書) 양운(楊?)전의 이야기. 양운은 한(漢)나라 소제(昭帝) 때 승상을 지냈던 양창의 둘째 아들이며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의 외손자이다. 그는 재물을 탐하지 않고 청렴결백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결점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한편 양운과 원한이 있었던 대장락이라는 관리는 양운이 황제를 비방했다는 글을 직접 황제에게 올렸다. 대장락은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양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능한 왕은 충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 책략을 쓸 줄도 모르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 과거 진나라도 충신을 죽이고 소인들만을 등용하여 결국 망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 한 산속의 담비로구나.}]
양운과 대장락은 모두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양운은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답답함을 호소했는데, 이 사실이 한나라 선제에게 발각되어, 결국 허리를 절단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一丘之狢]이란 같은 산속에서 살고 있는 담비라는 뜻으로, [나쁜 사람들의 무리]를 비유한 말이다.
226
愚公移山(우공이산)
愚(어리석을 우) 公(존칭할 공) 移(옮길 이) 山(뫼 산)
열자 탕문(湯問)편의 이야기. 태행산과 왕옥산은 원래 기주의 남쪽, 하양의 북쪽에 있었는데, 산 밑에는 90세가 다 된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가로 막은 두 산 때문에 큰 불편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 우공은 가족들을 모아 놓고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의 부인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반대했으나 다른 가족들이 모두 찬성했기 때문에 곧 공사에 착수했다.
이를 본 지수라는 사람은 이름 그대로 우직하고 미련한 노인네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우공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그 아들이 죽으면 또 손자가 있고, 또 그 손자의 아들이 또 있을게 아닌가. 이와 같이 자자손손 일을 계속한다면 이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네."
하늘에서 이 말을 들은 천제(天帝)가 우공의 꾸준한 노력과 성의를 가상히 여겨, 산 하나는 삭동 땅에, 다른 하나는 옹남 땅에 옮겨 놓게 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 때, 묵묵히 노력하는 우공의 정신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같다.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자. [愚公移山]이란 [아무리 큰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루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227
招搖過市(초요과시)
招(부를 초) 搖(흔들릴 요) 過(지날 과) 市(저자 시)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의 이야기. 공자는 광(匡) 지역을 떠나 포(浦)땅에서 잠시 머문 뒤, 위(衛)나라에 와서 거백옥(?伯玉)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위나라 영공에게는 남자(南子)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사람을 보내 공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공자는 이를 사양하다가 부득이 그녀를 만나러 갔다. 부인은 휘장 안에서 답례하였는데, 이때 허리에 찬 구슬 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공자는 돌아와서 불만스러워하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말했다.
[나는 원래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기왕에 만났으니 이제는 예로 대해 주어야겠다. 만일 내가 잘못이라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위나라에 머문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영공은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환관인 옹거(雍渠)를 시위관으로 옆에 태우고 궁문을 나섰다. 공자는 뒷 수레에 타고 따라오게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뽐내며 시내를 지나갔다(使孔子爲次乘, 招搖過市之). 이에 공자는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招搖過市]란 [야단법썩을 피우며 자랑하고 다님]을 뜻하는 말이다.
228
後起之秀(후기지수)
後(뒤 후) 起(일어날 기) 之(-의 지) 秀(빼어날 수)
세설신어 상예(賞譽)편의 이야기. 동진(東晋) 때, 왕침(王?)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미치광이 같은 행동은 어려서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왕침이 삼촌인 범영(范寧)의 집에 갔는데, 마침 장현(張玄)이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범영은 장현과 왕침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현은 자리에 앉은채 왕침과는 인사도 하지 않았고, 왕침도 말을 하지 않고 나와버렸다. 범영은 왕침이 장현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왕침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진정으로 저를 알고 싶어한다면, 스스로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범영은 왕침의 성격을 칭찬하며 말했다. [너는 매우 희망이 있으니, 참으로 후배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로다.] 왕침은 말했다. [삼촌 같으신 분이 안계셨다면, 이런 조카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전해 들은 장현은 왕침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찾아왔다. 왕침도 그를 맞아들여 그들은 곧 좋은 친구가 되었다. 훗날 왕침은 형주자사(荊州刺史)를 맡아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後起之秀]란 [후배들 중의 우수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229
曳尾塗中(예미도중)
曳(끌 예) 尾(꼬리 미) 塗(진흙 도) 中(가운데 중)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의 이야기. 어느 날, 장자가 복수(?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초왕(楚王)이 보낸 두 대부(大夫)가 찾아왔다. 그들은 장자에게 왕이 관직을 맡기고자 한다는 말을 전달했다. 장자는 낚시대를 쥔 채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가 듣기에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지 이미 3천 년이나 되었다더군요. 왕께서는 이 거북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의 위에 모셔 놓았다지만,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긴 채 귀한 대접을 받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
사신들이 [그거야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장자는 곧바로 [그렇다면 어서 돌아 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고 싶으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
새 정부의 인사청문회가 있을 것 같다. 거론되는 인사들이 진정한 선비라면 장자처럼 머드팩(?)의 효과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曳尾塗中]은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230
死灰復燃(사회복연)
死(죽을 사) 灰(재 회) 復(돌아올 복) 燃(불사를 연)
사기 한장유(韓長孺)열전의 이야기. 서한(西漢) 시대, 양(梁)나라 효왕(孝王)의 수하에는 한안국(韓安國)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는 효왕과 한나라 효경제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여 관직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훗날, 그는 위법행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전갑이라는 옥졸이 그를 모욕하자, 한안국은 [지금은 불 꺼진 재이지만 다시 타오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전갑은 [다시 탄다면 오줌을 누어 꺼버리겠다.]라고 했다.
얼마 후, 양나라에 내사(內史) 자리가 비게 되었다. 한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한안국을 양나라의 내사로 임명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한안국은 곧 석방되어 다시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 소식을 들은 전갑은 놀라 달아나 버렸다. 한안국은 [전갑이 관직에 복귀하지 않으면 일족을 멸하겠다]라고 포고했다. 벌벌 떨며 자수해 온 전갑에게 한안국은 웃으면서 말했다.
[오줌을 누어 보아라. 너희 같은 무리들은 문책할 가치조차 없느니라.]
한보비리관련 정치인들이 모두 풀려났다. 그것도 오줌(?)에 불씨마저 꺼질 뻔했던 순간에. [死灰復燃]이란 [세력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득세함]을 비유한 말이다.
231
牝牡驪黃(빈모려황)
牝(암컷 빈) 牡(수컷 모) 驪(가라말 려) 黃(누를 황)
열자 설부(說符)편의 이야기. 진(秦)나라 목공이 백락(伯樂)에게 말을 잘 고를 만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자, 그는 구방고라는 사람을 소개했다. 목공은 그에게 좋은 말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석달 뒤 구방고는 돌아와서 보고하길, [지금 사구라는 곳에 있습니다. 누런 색의 암놈입니다.]했다.
목공이 다른 사람을 시켜 알아 보니, 검은 색에 수놈이라 하였다. 목공은 곧 백락을 불러서 [구방고라는 자는 말의 색깔과 암수조차도 구별하지 못했소.]라고 꾸짖었다. 백락은 크게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방고는 정수만을 파악하고 대체적인 것은 잊어버립니다. 그는 속을 살피고서 외모는 잊어 버리며, 보아야 할 것만을 보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않습니다. 그는 살펴야만 할 것만을 살피고 살피지 않아도 될 것은 빠뜨린 것입니다. 그가 말을 골랐다는 것은 그 말의 귀중한 특징을 발견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마 후, 그가 골랐다는 말을 데려와 보니 과연 천하의 명마였다.
[牝牡驪黃]이란 이렇듯 [사물을 인식하려면 그 실질을 파악하여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232
曲突徙薪(곡돌사신)
曲(굽을 곡) 突(굴뚝 돌) 徙(옮길 사) 薪(땔나무 신)
한서(漢書) 곽광(囍光)전의 이야기. 한나라 선제(宣帝) 때, 황후의 부친인 곽씨 일가가 모반을 꾀하였다. 선제는 곽씨 일가를 멸하고, 그들을 진압한 사람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을 미리 제거하라고 간언하였던 서복(徐福)이라는 사람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한 신하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선제에게 불공평함을 간언하였다.
[옛날, 한 나그네가 어느 집을 찾아 왔다가, 그 집의 굴뚝이 똑바로 서있어서 불꽃이 위로 곧장 치솟는 것과 아궁이 옆에는 땔감이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땔감은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이 집에 정말 불이 났습니다만,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주인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였는데, 주인에게 충고했던 그 나그네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집주인에게 {그 나그네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술자리도 필요없을 것이며, 불도 나지 않았을 것이요. 그 나그네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답니다.]
[曲突徙薪]이란 [준비를 철저히 하여 화근을 미연에 방지함]을 뜻한다.
233
解衣推食(해의추식)
解(풀 해) 衣(옷 의) 推(옮을 추) 食(밥 식)
사기 회음후(淮陰侯)열전의 이야기. 한신(韓信)은 본시 초나라 항우(項羽) 밑에서 말단 군관을 지냈으나, 항우가 자신을 크게 써주지 않자 유방(劉邦)에게 귀순하였다. 유방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한신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 항우는 20만 대군을 보내 제나라를 지원하며 한신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초나라 군대를 무참하게 격파하였다. 한신의 뛰어난 능력에 감탄한 항우는 사람을 보내 한신에게 스스로 왕이 되라고 권하였다.
한신은 그의 말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 내가 항우의 부하로 있을 때, 그는 나를 하급군관에 임명하여 하찮은 일만을 시키고, 나의 계책을 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이제 한나라 왕은 나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수만 대군을 통솔하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자기의 옷을 벗어 입게 해주고, 자기의 먹을 것까지도 먹게 해주었소. 내가 어떻게 그런 분을 배신하고 스스로 왕이 될 수 있겠소?]
[解衣推食]이란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사심없이 선심을 베품]을 비유한 말이다.
234
鐵面皮(철면피)
鐵(쇠 철) 面(낯 면) 皮(가죽 피)
송(宋)나라 손광헌(孫光憲)이 쓴 북몽쇄언(北夢?言)에 나오는 이야기.
왕광원(王光遠)이란 진사(進士)가 있었다. 그는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 진사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 그는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아부를 계속했다.
하루는 어떤 고관이 술에 취해 매를 들고 그에게 [때려 주고 싶은데 한 대 맞아 보겠나?]하고 말했다. 아부꺼리만 찾고 있던 왕광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인의 매라면 맞고 말고요.]라고 하였다.
사정없이 얻어 맞은 왕광원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친구가 [자네는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나?]하고 물었다. 왕광원은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손해볼 게 없잖아?]하고 대답했다. 이런 왕광원을 가리켜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왕광원의 낯가죽은 열 겹의 철판만큼 두껍다.]라고.
독도문제로 한참을 떠들어 대더니, 이번에는 일방적인 어업 협정 파기. 낯가죽이 두꺼워도 너무 두껍다.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다. 무식해도 너무 무식하다. [鐵面皮]란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235
捉襟見肘(착금견주)
捉(잡을 착) 襟(옷깃 금) 見(볼 견) 肘(팔꿈치 주)
장자 양왕(讓王)편의 이야기. 증자(曾子)가 위(衛)나라에 살고 있을 때, 그의 솜옷은 다 낡아서 껍데기가 없었으며,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종기가 곪아 터졌으며, 손발은 트고 갈라져 있었다. 그의 집은 사흘 동안이나 불을 때지 못했으며, 십 년이 넘도록 옷 한 벌을 변변히 지어 입지 못했다.
갓을 쓰려고 하면 갓끈이 끊어지고, 옷깃을 여미려 하면 팔꿈치가 나오고(捉襟而?見), 신을 신으려 하면 뒤꿈치가 터져 버리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신발을 끌면서 시경을 읊으면, 그 소리는 사방에 가득차며 마치 금석(金石)의 악기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증자는 높은 벼슬도 하지 못했으며, 귀족들과 벗하지도 못했다.
형편이 예전과 같지 않다보니, 70년대식 생활 모습이 차츰 나타나고 있다. 연탄이 인기를 끌고, 장작을 때는 아궁이도 다시 등장했다. 유행이 지난 옷을 입어도 쳐다 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제 조그만 더 있으면 팔꿈치 뚫린 저고리와 구멍난 양말이 새로운 유행(?)을 이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捉襟見肘]란 옷깃을 여미면 팔꿈치가 나와 버린다는 뜻으로, [재정적으로 형편이 어려움]을 비유한 말이다.
236
牝鷄司晨(빈계사신)
牝(암컷 빈) 鷄(닭 계) 司(맡을 사) 晨(새벽 신)
상서(尙書) 목서(牧誓)의 이야기. 은(殷)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폭정이 심해지자, 주(周)나라 서백(西伯)의 아들 발(發)은 주왕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발은 목(牧) 땅에 이르러 군사들을 격려하며 훈시를 시작하였다.
[나를 따르는 제후와 용사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들고, 그대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그대들의 긴 창을 세우시오. 내 훈시를 하겠소. 옛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소. {암탁은 아침을 알리지 않는 것이니, 암탉이 아침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였소. 지금 은나라의 주왕은 오직 여자의 말만 듣고,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할 분들을 버리고 보답하지 않고 있으며, 살아 있는 임금의 부모형제들도 버렸소.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죄를 짓고 도망온 자들을 공경하며 믿고 그들에게 벼슬자리를 주고 있소. 그는 백성들에게 포학한 짓을 일삼으며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소. 지금 나는 오직 하늘의 벌을 주려고 하는 것이오. 용사들이여, 힘을 내시오.]
[牝鷄司晨]이란 [여자가 기승을 부림]비유한 말이다. 얼마 전 한 여인 때문에 곤경에 처했던 미국의 대통령.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순리에 어긋나면 뒷탈(?)이 생기는 법이다.
237
金石爲開(금석위개)
金(쇠 금) 石(돌 석) 爲(할 위) 開(열 개)
신서(新序) 잡사(雜事) 4편의 이야기. 주(周)나라 때, 초(楚) 지방에 웅거자(熊渠子)라는 유명한 활의 명수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는 홀로 산속에 걷다가, 앞에 호랑이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풀무더기를 발견하고, 즉각 활을 잡아당겼다. 그는 호랑이가 맞아 죽었으리라고 확신하였다.
한참을 기다려 보았지만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호랑이라면 죽기 전에 분명히 몸부림을 쳤을텐데, 이것은 전혀 움직임이 없는게 아닌가. 웅거자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의심이 들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거대한 바위였다. 이러한 일은 웅자거의 강한 힘과 집중된 정신에서 나온 강한 신념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많은 국민들이 금(金)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금 화살로 달러의 바위를 뚫는 작전(?)이다. 국민들의 의지가 이렇듯 강한 이상, 머지않아 종이로 만든 달러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金石爲開]란 [의지가 강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사석위호(射石爲虎)] [중석몰시(中石沒矢)] 등이 있다.
238
半部論語(반부논어)
半(반 반) 部(분류 부) 論(말할 론) 語(말씀 어)
송(宋)나라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鶴林玉露)에 실린 이야기. 북송(北宋) 초, 산동(山東)에 조보(趙普)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송 태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여 송나라를 건국하게 하였다. 태종(太宗)이 제위를 계승하자, 그는 승상에 임용되어 국가를 매우 잘 다스렸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그가 겨우 논어 밖에 읽지 않아 학식이 없는데다, 별다른 재능도 없어서 중책을 맡기 어렵다고 모략하였다. 송 태종이 이를 알고 조보에게 묻자, 조보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대답하였다.
[저의 평생 지식은 분명히 논어를 넘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논어의 절반 지식으로 태조께서 천하를 평정하시는 일을 도왔으며, 이제는 그 나머지 절반의 지식으로 폐하께서 천하를 다스리도록 돕고 있습니다.]
[半部論語]란 반 권의 논어라는 뜻으로 [고전의 학습이 매우 중요함]을 비유한 말이다. 요즘 가벼운 읽을거리만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가뜩이나 복잡한 때 골치 아픈 책을 읽지 않겠다는 독서 전략(?)이다. 하지만 약으로 말하면, 옛 성현들의 지혜가 담긴 고전은 인삼녹용이 든 보약중의 보약과 같은 것을....
239
量體裁衣(양체재의)
量(헤아릴 량) 體(몸 체) 裁(마를 재) 衣(옷 의)
남제서(南齊書) 장융전(張融傳)의 이야기. 남북조 시대, 남제(南齊)에 글재주가 좋은 장융이라는 고관(高官)이 있었다. 그는 비록 요직에 있었지만 평소 생활은 검소하였으며, 항상 오래되고 낡은 의복을 입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나라 태조는 사람을 시켜 자신이 입던 옷을 장융에게 보냈다. 당시 황제가 자신이 입던 옷을 하사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할 상이었다. 제나라 태조는 옷을 보내면서 친서(親書)도 함께 보냈는데, 태조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경의 옷차림을 보고 경의 생활이 매우 검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소. 그런데 경과 같은 고관이 낡고 헤어진 옷을 입는 것은 조정의 체면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으며, 백성들로부터 과인이 경을 천하게 대우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소. 지금 옷을 함께 보내니, 좀 낡긴 했지만 새옷을 입는 것보다는 더 잘 맞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 옷들은 과인이 특별히 사람을 시켜 경의 몸에 맞게 고치도록 하였기 때문이오.]
[量體裁衣]란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문제나 일을 처리함]을 비유한 말이다.
240
汗流浹背(한류협배)
汗(땀 한) 流(흐를 류) 浹(적실 협) 背(등 배)
사기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의 이야기. 서한(西漢)시기, 한문제(漢文帝)는 태위 주발(周勃)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진평은 좌승상에 임명하였다. 문제는 국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자, 어느 날 조회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물었다. [일 년 동안 전국에서 옥사를 판결하는 건수가 얼마인가?] 주발은 사죄하며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문제는 다시 일 년 동안 전국의 재정상의 수입과 지출이 얼마인가를 물었다. 주발은 또 모른다고 사죄하며 땀으로 등을 적시면서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汗出霑背, 愧不能對).
문제가 다시 진평에게 묻자, 진평은 조리있게 대답을 잘했다. 문제는 진평의 답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우승상 주발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신의 능력이 진평에 못 미침을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주발은 병을 핑계로 재상의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외환 위기의 책임 문제가 강도높게 제기되고 있다. 아마도 몇몇 사람들은 지금쯤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을 것이다. [汗流浹背]란 [극도로 무서워하거나 긴장된 상황]을 비유한 말이다.
241
欲蓋彌彰(욕개미창)
欲(하고자 할 욕) 蓋(덮을 개) 彌(널리 미) 彰(밝힐 창)
춘추좌전 소공(昭公) 31년조의 이야기. 춘추시기, 노(魯)나라 소공 31년 겨울, 주(?)나라 대부 흑굉(黑肱)이 주나라를 배반하고 노나라에 투항하자, 그가 다스렸던 남(濫)땅은 노나라에 편입되었다. 흑굉은 본시 신분이 높은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굳이 그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공자는 흑굉으로 인하여 국토의 변동이라는 큰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 춘추에 이 사건을 분명히 기록하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름이 나타나 있으면서도 나타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한 일이 있다. 토지를 지니고 군주를 배반한 일은, 그의 지위가 비록 낮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 땅 이름을 써서 밝히고 그 사람을 말했는데, 그것은 결국 불의(不義)가 되고, 그 불의는 없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몸이 움직이게 되면 예의를 생각하고, 무슨 일을 행하면 의리를 생각하며, 이익을 위해서 비뚤어지지 않고, 의리를 위해서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혹은 이름나기를 원하나 이름나지 못하게 되고, 혹은 이름을 감추려 하나 이름이 나타나게되는 것은 불의를 징벌하려는 것이다(或欲蓋而名章, 懲不義也).]
[欲蓋彌彰]은 [진상을 감추려 하나 모두 드러나게 됨]을 뜻한다.
242
出爾反爾(출이반이)
出(날 출) 爾(너 이) 反(되돌릴 반) 爾(너 이)
맹자 양혜왕(梁惠王) 하편에 나오는 이야기. 전국시대 추나라는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였다. 추나라 목공은 자신의 잘못된 정치를 반성하지 않고, 병사들과 백성들이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아 패하였다면서 그들을 탓하였다. 가르침을 청하는 목공에게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흉년과 기근이 든 해에 추나라의 백성들 중에는 노약자들이 도랑에 빠져 죽고,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는데, 그 수효가 천명에 가깝습니다. 한편 관리들은 왕의 창고에는 곡식과 물자가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 사실을 왕께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윗사람이 교만하여 아랫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증자는 {경계할지라. 너에게서 나간 것은 너에게로 돌아오느니라(出乎爾者, 反乎爾者也)}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당한 것을 다시 갚았던 것이니, 왕께서는 그들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렇듯 정치의 품질에 따라 국민들의 충성의 질도 달라진다. 좋은 정치에는 칭송과 박수 갈채가 따르지만, 나쁜 정치에는 비난과 야유라는 보답이 있을 뿐이다. [出爾反爾]는 [언행의 앞뒤가 서로 모순되고 신의(信義)가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243
曲學阿世(곡학아세)
曲(굽힐 곡) 學(배울 학) 阿(아첨할 아) 世(세상 세)
사기 유림열전(儒林列傳)의 이야기다. 한나라 경제(景帝) 때, 시경(詩經)에 정통했던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학문으로 왕자의 스승을 지냈으나 병 때문에 물러났다. 얼마 후,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원고생은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되었는데, 아첨을 일삼는 관리들은 그가 너무 늙었다며 헐뜯었다.
원고생이 조정의 부름을 받았을 때, 당시 60세이던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사람도 함께 부름을 받았다. 공손홍은 늙은 원고생을 꺼리며 마땅치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에 원고생은 공손홍의 태도를 보고 말했다.
[바른 학문에 힘써 직언(直言)하도록 하시오. 배운 것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일부 대학, 그것도 국립 대학의 교수 채용을 둘러싼 비리(非理) 소식이 보도되었다. 자존심을 포기한 선비들의 왜곡된 학문의 결과이며,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별로 신기하지 않은 비밀(?)이기도 하다. [曲學阿世]란 이렇듯 [자신의 학문을 굽히면서 권세나 세속에 아첨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244
兼聽則明(겸청즉명)
兼(겸할 겸) 聽(들을 청) 則(곧 즉) 明(밝을 명)
자치통감(資治通鑒) 당기(唐紀)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조의 이야기. 당나라 태종 때 위징(魏徵)이라는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다. 그는 역사에 정통하였기 때문에 항상 당태종에게 여러 가지 계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서기 628년,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은 당태종이 그에게 물었다.
[나라의 군주로서 어떻게 해야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는가? 또한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경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위징은 이렇게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 말만 듣고 그것을 믿는다면 일을 잘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위징은 역사적인 교훈을 예로 들면서, 군주의 편파적인 판단이 얼마나 큰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지 설명하였다. 위징의 말은 차기 대통령의 비서진과 각료 인선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兼聽則明]이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면 시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음]을 뜻한다.
245
負重致遠(부중치원)
負(질 부) 重(무거울 중) 致(보낼 치) 遠(멀 원)
삼국지 촉서(蜀書) 방통(龐統)전의 이야기. 삼국시기,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이었던 주유(周瑜)가 병으로 죽자, 그의 친구인 방통은 몹시 슬퍼하며 달려와 조문을 하였다. 박학다식하고 명성이 높은 방통이 동오지방에 오자, 동오의 명사(名士)인 육적, 고소, 전종 등은 그와 친분을 맺었다. 문상을 마치고 방통을 환송하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방통은, 육적에 대해서는 잘 달리는 말과 같은 인재라고 하고, 고소는 힘든 일을 이겨내며 일하는 소와 같다라고 하고, 전종은 지혜는 좀 떨어지지만 그 역시 당대의 인재라고 평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방통에게 [그렇다면 육적의 재능이 고소를 능가한다는 뜻입니까?]하고 묻자, 방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말은 민첩하여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한 사람 밖에 태울 수 없소. 하지만 소는 하루에 삼백리를 갈 수 있거니와, 소가 짊어진 짐이 어찌 한 사람의 몸 무게만 되겠소?]
[負重致遠]이란 무거운 물건을 지고 먼 곳까지 간다는 뜻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246
屢見不鮮(누견불선)
屢(여러 누) 見(보일 견) 不(아닐 불) 鮮(깨끗할 선)
사기 역생육가(?生陸賈)열전의 이야기. 초한(楚漢)이 천하를 다투던 때, 한나라의 유방(劉邦)을 수행하며 세객(說客)으로 있던 육가(陸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방이 죽은 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육가는 월(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받은 두 개의 보물자루를 천 금을 받고 팔아, 자식들에게 2백 금씩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보검(寶劍)을 차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탄 채 하인 10명을 거느리고 다녔다. 어느 날, 육가는 자식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너희들 집에 들르거든 너희들은 하인들과 말에게도 음식을 주어야 하며, 10일간 지내고 다음 집으로 갈 것이다. 그러다 내가 죽게 되거든 바로 그 집에서 나의 보검, 수레와 말, 그리고 하인들은 갖도록 하여라. 여러 군데 들르다 보면 1년 중 너희들 집에 들르는 것은 두세 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너무 자주 보면 새롭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한 번 총리는 영원한 총리(?). 잘 하면 두 세기에 걸쳐 해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구관(舊官)의 대명사인 JP를 놓고 되느니 안되느니 말이 많다. [屢見不鮮]이란 [너무 자주 보아 전혀 새롭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247
行不由徑(행불유경)
行(갈 행) 不(아닐 불) 由(따를 유) 徑(지름길 경)
논어 옹야(雍也)편의 이야기.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이라는 작은 고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에게 축하도 하고, 또 잘 하고 있는 지도 볼 겸하여 공자가 찾아 왔다. 공자는 반가운 마음으로 자유에게 [자유아, 일을 잘하려면 좋은 사람이 필요할 텐데, 너의 수하에 쓸만한 인재이라도 있느냐?]하고 물었다.
자유가 대답하였다. [예, 있습니다. 성이 담대(澹臺)이고 이름이 멸명(滅明)이라는 자가 있사온데, 그는 언제나 지름길로 다니지 않으며(行不由徑),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저의 방에 찾아 오는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입니다.]
돈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일부 대학의 교수들, 그리고 전현직 판사들과 변호사들, 소위 지도급 인사들의 냄새나는(?)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이 번듯한 큰 길을 두고 자꾸 샛길만을 고집하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徑]은 [지름길이나 샛길]을 뜻한다. [行不由徑]이란 지름길이나 샛길을 가지 않고 떳떳하게 큰 길로 가는 것이니, 이는 곧 [눈 앞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함]을 비유한 말이다.
248
一葉障目(일엽장목)
一(한 일) 葉(잎 엽) 障(가로막을 장) 目(눈 목)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이 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갈천자(厠冠子) 천칙(天則)편의 이야기. 옛날 초나라 땅에 가난한 한 서생(書生)이 있었다.
그는 회남자(淮南子)를 읽고 사마귀 벌레가 매미를 잡을 때 나뭇잎에 몸을 숨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나무를 찾아 잎사귀를 모조리 따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나뭇잎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채 아내에게 자기의 모습이 보이는지 물어보았다. 처음 그의 아내는 [다 보인다.]고 대답하였으나, 남편이 계속 이렇게 눈을 가리고 다니자 어찌나 보기 싫었던지 그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 버렸다.
아내의 말에 자신감이 생긴 서생은 잎사귀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길거리로 나갔다. 그는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심문하는 관리에게 [나뭇잎으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당신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는 관리로부터 미친 놈 대접을 받았다.
[一葉障目]은 [국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미혹되어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249
一傅衆咻(일부중휴)
一(한 일) 傅(스승 부) 衆(무리 중) 咻(떠들 휴)
맹자 등문공하(?文公下)편의 이야기. 전국(戰國) 시대, 송(宋)나라의 대부 대불승(戴不勝)이 강왕을 도와 인정(仁政)을 실시해 보려고 설거주(薛居州)를 시켜서 왕을 보필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맹자는 송나라를 방문하였다. 대불승을 만난 맹자는 그에게 물었다.
[어떤 초(楚)나라 대부가 자기 아들에게 제(齊)나라 말을 배우게 하려는데, 제나라 사람을 시켜 가르치는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초나라 사람을 시켜서 가르치는 게 낫겠습니까?] 대불승은 [당연히 제나라 사람을 시켜서 가르쳐야 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나라 사람 한 명이 가르치는데, 많은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고 떠들기만 한다면(一齊人傅之, 衆楚人?之), 매일 매 때리며 제나라 말을 하라고 강요한다 해도 배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를 몇 년 동안 제나라의 번화한 길거리에 데려다 두고, 배우게 한다 할지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맹자는 대불승 혼자의 힘으로는 어진 정치가 실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다. [一傅衆?]란 [학습 환경이 좋지 않고 방해가 많음]을 뜻하며, 일에 성과가 없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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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傍苦李(도방고리)
道(길 도) 傍(곁 방) 苦(쓸 고) 李(오얏 리)
진서(晉書) 왕융전(王戎傳)의 이야기. 진 나라의 왕융(서기 234-305년)은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며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좋아하였다. 그는 유유자적하며 인생을 즐기고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왕융이 일곱 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동네의 아이들과 놀다가 문득 길가의 자두나무에 가지가 휘어지게 많은 자두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따려고 앞다투어 그 나무로 달려갔으나, 왕융만은 그 자리에 가만 있었다.
그때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왕융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왜 따러가지 않고 서 있는 거냐?]
왕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무가 길 가에 있는데도 열매가 저렇게 많이 달려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써서 먹지 못하는 자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 자두를 따서 맛을 보니 과연 왕융의 말처럼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라 살림을 절반으로 줄여버린 YS, 퇴임 박두(?). 마침내 나쁜 추억 속으로 초라하게 버려지는 순간이다. [道傍苦李]란 길 옆의 쓴 자두나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버린 물건이나 무용지물]을 비유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