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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13

도시와 유령 - 이효석 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인 산골쪽 비탈길 여우의 밥이 다 되어 버린 해골덩이가 똘똘구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이 뿌리는 버덩의 다 쓰러져 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 백 년이다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에는 흔히 도깨비나 귀신이 나타난다 한다. 그럴 것이다. 고요하고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칙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곳에서 그런 것을 본 적은 없다. 따라서 그런 것에 관하여서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 나는――자랑이 아니라―― 더 놀라운 유령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이니 놀라웁단 말이다. 나는 그래도 문명을 자랑하는 서울에서 유령을 목격하였다. 거짓말이라구? 아니다. 거짓말도 아니.. 2021. 4. 15.
배따라기 - 김동인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할 위엄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그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런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나는 잠시도 멎지 않고, 푸른 물을 황해로 부어 내리는 대동강을 향한, 모란봉 기슭 새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이날은 삼월 삼질,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물 위에는, 결결이 반짝이는 물결을 푸른 놀잇배들이 타고 넘으며, 거기서는 봄 향기에 취한 형형색색의 선율이, 우단보다도 부드러운 봄 공기를 흔들면서 날아온다. 그리고 거기서 기생.. 2021. 4. 9.
[전문] 술값 외상 - 김동인 임진 난리라는 무서운 국난을 겪기 때문에 국탕이 한때 죄 고갈되었던 그 상처도 한 삼십 년 지나서는 얼마만치 회복되었다. 임진 직후에는 무슨 관기(官妓)깨나 있다 손 치더라도 그런가 보다 쯤으로 여겼지 명기니 무엇이니 구별할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거니와 그것도 한 삼십 년 지나니까 사람의 본능이란 할 수 없는 것이라 유흥이 늘어 가고 명기니 무엇이니 하는 것도 차차 생겨났다. 이러한 가운데 자고로 기생으로 이름 높은 평양에 동정월(洞庭月)이라는 기생 —명기가 있었다. 노래 잘하였다. 춤 잘 추었다. 묵화(墨畵) 깨도 칠 줄 알았다. 기생으로 가져야 할 지식은 다 그만하면 제법이었다. 이상의 것을 마음여겨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명기가 되려면 꼭 필요하고도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 2021. 4. 7.
[전문] 죄와 벌 (어떤 사형수의 이야기) - 김동인 작품소개 연회 후, 2차 모임에서 한명의 퇴직한 판사에게 다들 퇴직 이유를 묻는다. 판사는 쉬고 싶어 사직했다고 하지만 그에게도 사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판사를 할 때 어떤 사형수와 관련이 있었는데... “내가 판사를 시작한 이유 말씀이야요? 나이도 늙고 인젠 좀 편안히 쉬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사직했지요, 네? 무슨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글쎄, 있을까. 있으면 있기도 하고, 없다면 없고, 그렇지요. 이야기 해보라고요? 자, 할 만한 이야기도 없는데요.” 어떤 날 저녁, 어떤 연회의 끝에 친한 사람 몇 사람끼리 제2차 회로 모였을 때에, 말말끝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그 전 판사는 몇 번을 더 사양해본 뒤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사법관이지 입법관이 아니.. 2021. 4. 7.
[전문] 술 권하는 사회 - 현진건 작품소개 1921년 《개벽(開闢)》 17호에 발표되었다. 작가의 신변을 다룬 초기 소설로서 일제의 탄압하에서 많은 애국적 지성들이 어쩔 수 없이 절망하고 술을 벗삼게 되어 주정꾼으로 전락하는데, 그 책임은 바로 '술 권하는 사회'에 있다고 자백한다. 새벽 2시에 대취하여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느냐고 안타까워한다. 남편은 조선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내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남편은 "아아 답답해!" 하며 또다시 밖으로 나간다. 아내는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원망하며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하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에서의 답답하고 절망적인 한 지식인의 불안을 그린 리얼리즘 소설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술 권하는 사회 [─勸─社會] (두산백과.. 2021. 4. 3.
[전문]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작품소개 1934년 《신동아》지(誌)에 발표. 1933년까지 이 작가가 발표한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단편 《화물자동차》 《인형의 집을 나와서》 등 일련의 작품은 프로문학에 대한 동반자적 입장에서 쓴 것이었으나, 《레디메이드 인생》과 《치숙(痴叔)》 등에서는 당시의 한국 지식인의 운명과 그 곤경을 제재로 삼으면서 풍자성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경제공황기에 실직 중인 P는 이력서를 들고 이곳 저곳 찾아 다니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나서 자신이 인텔리인 것을 원망, 책을 잡혀 친구들과 선술집 · 카페 · 색주가로 돌아다니며 실업자의 울분을 터뜨린다. 아들만은 자신과 같은 인텔리 실직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보통학교도 안 마친 애를 잘 아는 인쇄소에 맡기고 돌아오면서 “레디메이드(기성.. 2021.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