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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5

배따라기 - 김동인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할 위엄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그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런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나는 잠시도 멎지 않고, 푸른 물을 황해로 부어 내리는 대동강을 향한, 모란봉 기슭 새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이날은 삼월 삼질,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물 위에는, 결결이 반짝이는 물결을 푸른 놀잇배들이 타고 넘으며, 거기서는 봄 향기에 취한 형형색색의 선율이, 우단보다도 부드러운 봄 공기를 흔들면서 날아온다. 그리고 거기서 기생.. 2021. 4. 9.
[전문] 술값 외상 - 김동인 임진 난리라는 무서운 국난을 겪기 때문에 국탕이 한때 죄 고갈되었던 그 상처도 한 삼십 년 지나서는 얼마만치 회복되었다. 임진 직후에는 무슨 관기(官妓)깨나 있다 손 치더라도 그런가 보다 쯤으로 여겼지 명기니 무엇이니 구별할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거니와 그것도 한 삼십 년 지나니까 사람의 본능이란 할 수 없는 것이라 유흥이 늘어 가고 명기니 무엇이니 하는 것도 차차 생겨났다. 이러한 가운데 자고로 기생으로 이름 높은 평양에 동정월(洞庭月)이라는 기생 —명기가 있었다. 노래 잘하였다. 춤 잘 추었다. 묵화(墨畵) 깨도 칠 줄 알았다. 기생으로 가져야 할 지식은 다 그만하면 제법이었다. 이상의 것을 마음여겨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명기가 되려면 꼭 필요하고도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 2021. 4. 7.
[전문] 죄와 벌 (어떤 사형수의 이야기) - 김동인 작품소개 연회 후, 2차 모임에서 한명의 퇴직한 판사에게 다들 퇴직 이유를 묻는다. 판사는 쉬고 싶어 사직했다고 하지만 그에게도 사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판사를 할 때 어떤 사형수와 관련이 있었는데... “내가 판사를 시작한 이유 말씀이야요? 나이도 늙고 인젠 좀 편안히 쉬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사직했지요, 네? 무슨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글쎄, 있을까. 있으면 있기도 하고, 없다면 없고, 그렇지요. 이야기 해보라고요? 자, 할 만한 이야기도 없는데요.” 어떤 날 저녁, 어떤 연회의 끝에 친한 사람 몇 사람끼리 제2차 회로 모였을 때에, 말말끝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그 전 판사는 몇 번을 더 사양해본 뒤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사법관이지 입법관이 아니.. 2021. 4. 7.
[전문] 결혼식 - 김동인 어떤날 어떤 좌석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잡담들을 하던 끝에 K라는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물었다. “자네, 김철수라는 사람 아나?” “몰라.” 나는 머리를 기울이며 대답하였다. 물론 ‘김’이라는 성이며 ‘철수’라 는 이름은 흔하고 흔한 것인지라 어디서 들은 법도 하되, 이 좌석에서 새삼스레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김철수’가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으므 로……. “아마 모르리. 지금도 조도전(早稻田) 대학 재학생이니까…….” “모르겠네.” “송선비라는 여자는 아나?” “몰라. 아, 가만있게. 뭘 하는 여잔가?” “○유치원 보모.” “응, 생각나네. 아주 멋쟁이.” 나는 언젠가 유치원 연합 운동회에서 본 기억을 일으키며, 그 많은 관중 앞에서 필요 이상의 멋을 부리며 돌아가던 어떤 보모를 머리에 그려보면서.. 2021. 3. 27.
[전문] 이십세의 야망가 - 김동인 나의 이십 살 때 ⎯⎯ 그 때는 꼭 三[삼]•一[일] 사건의 다음 해요, 내가 문학 생활을 시작한 지 꼭 이태째 되는 해외다. 三[삼]•一[일] 사건이라 하는 것은 그때의 조선을 후조선으로 나누니만치, 조선에 있어서는 뜻 깊은 운동이었읍니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이 사건에 자극이 되어 무엇이든 해보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한 때였읍니다. 마침 文學生活[문학생활]을 시작한 직후에 또한 이런 큰 사건이 있었읍니다. 조선문학의 開拓者[개척자] ⎯⎯ 이런 놀라운 野望[야망]을 품고 있던 나는 이 〈움직이는 조선〉에 더욱 등이 밀리는 듯하여 성급히 앞으로 邁進[매진]할 따름이었읍니다. 때가 때였읍니다. 나이가 나이였읍니다. 게다가 방금 文學 [문학]의 길에 발을 들여 놓은 풋靑年[청년]이었읍니다. 앞뒤를 돌아보거나 남.. 2020.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