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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나의 유년시절 - 강경애

by 시애틀 2023. 6. 13.

5세에 아버지를 여읜 나는 일곱 살에 고향인 송화를 등지고 장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는 생계가 곤란하시므로 더구나 장차 의지할 아들도 없고 다만 딸자식인 나를 믿고 언제까지나 살아가실 수 없는 고로 개가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의붓아버지에게는 남매가 있었으니 남아는 16, 7세 가량이었으며 계집애는 내 한 살 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온 지 이틀도 지나기 전에 벌써 우리들은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속상하실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붓아버지까지라도 적지 않게 실망을 하여 나중에는 몇 번이나 헤어지려고까지 한 기억이 아직껏 남아 있습니다.

 

우리들이 싸움을 하고 울 때마다 어머니는 너무 속상해서 우시면서,

“경애야 너 싸우지 마라. 너 정말 늘 그러면 난 이렇게 눈 감고 죽고 말겠다.”

하시는 것이 거의 날마다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철없는 나이라 죽는다는 말에는 그만 겁이 나서 그렇게 북받치는 울음도 마음껏 내 울지 못하고 어머니 일하는 곁에 성명 없이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돌아가시는 것을 본 까닭으로.

그러나 웬일인지 날이 갈수록 어머니를 빼놓고 그 집안 식구는 나를 몹시도 미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잠시만 빨래 같은 것을 하시게 되어 집에 안 계시면 의붓아버지까지라도 한목이 되어 나에게 그 무서운 눈을 흘기며 조금만 잘못하면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반길에 가까워 오는 저이건만 아직까지도 그 눈 흘기는 기억이 문득 문득 생각 키울 때가 많습니다.

 

 

 

 

제가 바로 열 살 나던 때의 봄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적으니까 그때에는 모두가 날 보고 도토리알이라는 별명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지는 엉뚱나게 발달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벌써 『조웅전』이며 『숙향전』 할 것 없이 내 눈에 띄인 소설책이라고는 기어코 독파하고야 견디었습니다.

봄! 우리집 뒷산에는 살구꽃 앵두꽃 복숭아꽃 피어오르는 솜뭉치같이 아주 온 산을 푹 덮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각시를 만들어 가질 달래 풀까지 길이길이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날도 빨래를 가시며 싸움하지 말고 잘 놀아라고 몇 번이나 부탁하시며 누룽지를 두 아이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시고 가셨습니다. 우리들은 누룽지를 먹으며 소꿉질을 하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서 산으로 기어올라 달래 풀을 뜯기 시작하였습니다.

큰년이는 몸이 비둔하여 빨랑빨랑치를 못함으로 언제나 산에 오르게 되면 내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내가 먼저 뜯은 나무지에 손을 대었습니다. 역시 그날도 그러하였습니다. 한참 후에,

“경애야 경애야, 이리 오라우, 여기 달래풀 많아”

 

큰년이가 부름에 생각 없이 깡충깡충 뛰어갔더니 덮어놓고 내 치마 앞을 헤치고 들여다보며 그중 좋은 것으로 움켜쥐었습니다. 불의지변을 당한 나는 그만 너무 분하여서 큰년의 손을 쥐며 뿌리치니 그는 담박에 달려들어 나의 머리를 잡아 숙치며 꼬집어 당겼습니다. 그의 힘을 잘 아는 나는 어쩌는 수 없이 힘껏 뿌리치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씩씩하며 무섭게 따라왔습니다.

집으로 내려가려니 어머니가 아직도 안 오셨을 터이고 그래서 산 위로 도망질치다가 내가 매일 잘 오르는 살구나무를 타고 잔나비 모양으로 발발 기어올랐습니다. 그가 나무를 타지 못하는 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큰년이는 살구나무 아래에까지 와서는 나무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으니 마치 겨울에 눈 내리는 것처럼 꽃송이가 펄펄 날아 내 머리와 옷이며 그 애에게까지 빨갛고 희게 떨어집니다.

한참이나 흔들던 그는 싫증이 났던지 뭐라고 욕을 퍼부으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나는 적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어서 바삐 어머니가 오시기를 눈이 아물아물하도록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내 눈이 뚫어지도록 바라보던 어머니가 오실 그 길! 이 봄을 맞는 나에게 아직까지 그 길이 아득하게 나타나 보입니다.